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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더듬는 여행 실크로드

포도의 도시 투루판

8월 1일 목

생각보다 빠른 새벽 6시45분 투루판에 도착하였다.

허를 찔린것이 투루판역에서 시내까지가 꽤 멀다는 것이다. 봉고차를 60위안에 대절하여 40분정도 걸려 교통빈관으로 왔다. 새로 단장했다는 교통빈관(216)에 묵게되었는데 방은 크지않지만 알차고 깨끗하다. 시원한 에어컨이 있어 좋고....

아침은 숙소식당에서 부폐식(10)으로 먹었다. 만터우와 시판 그리고 달걀, 콩나물 무침 등이 놓여있다. 오랫만에 먹은 부폐식이라 그런가? 너무 과식을 한듯. 이제 음식앞에서 정신을 차려야겠다.

잠깐의 동네 탐색에서 돌아와 쾌적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다.

오후 3시. 숙소앞 시장에서 간단히 위그루식 식사를 하고 걸어서 포도넝쿨 거리로 갔다. 도보 20여분 걸리는 거리. 그러나 포도넝쿨 거리는 예전의 야시장과 여햄자들로 복작거리는 그런 거리가 아니었다. 대리석 바닥을 깐 잘가꾸어진 공원 거리랄까?

뭔가 향수를 빼앗긴 그런 기분이다. 포도거리를 걷다가 투루판 빈관을 찾아 마차를 타고 포도구로 가고자했으나 너무 덥고 피곤하여 오늘은 여기까지를 외치고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숙소앞 시장에서 생선튀김과 닭튀김을 사다 저녁을 먹다. 내일갈 고창고성 등은 어떤 모습일까?

 

★오늘 쓴돈

기차역 택시비 70,시내 택시비 5,먹거리 6,10,19,40,7,16,10,19=127

숙박비 216×2×3=1266, 막고굴 입장료 : 180(가이드비 포함)

오늘은 그저 동네를 어슬렁거리기로 했다. 숙소앞 바자르에 가서 눈요기를 하고 중국은행가서 800불 환전을(4852)하고 옥수수와 납작복숭아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8월 2일 금

숙소는 정말 깨끗하고 시원하고 쾌적하다. 간밤에도 잘잔듯

7시 반쯤 일어나 대충 씻고 8시부터하는 아침식사를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늘 아침은 어제보다 반찬이 두개정도 더있다. 모두가 우리 입맛에 맞는다.

8시반 어제 3일치 맡겨논 방값을

내일 떠날테니 하루치를 돌려 줄 수 있냐니까 .그럴 수 있단다. 내가 잘 들은 거겠지?

그리고 숙소앞에서 택시를 교섭(230)오늘 하루 여행을 시작하였다.

제일 처음 간곳은 화염산 벽을 막아놓고 40위안을 내란다. 망설이다 과감하게 패스하고 화염산이 멋지게 보이는 곳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하여 사진을 찍었다. 화염산은 돈을 내고 볼거까지는 없고 길고 넓게 늘어져있는 산이라서 이렇게길을 가다 멋진 곳에서 차를 세워놓고 보거나 사진을 찍으면 될 듯.

화염산의 기이한 경관은 삼장스님과 손오공의 행적을 실재했던 사건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환상적인 기이한 화염산을 끼고 고창고성으로 향한다.

예전엔 이길을 가면 길을 따라 수로가 있고 수로에는 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고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가로수들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는데 이제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우리가 다른 길을 다니고 있는 걸까?

나에게 있어 투르판의 기억은 거리 가득히 덮혀있는 포도나무 길과 천산의 풍부한 물이 흐르는 수로. 그리고 그 사이에주욱 늘어선 야시장들의 매캐한 석탄냄새와 양꼬치 굽는 냄새였다. 척박한 사막을 밤새 가로질러 도착한 천상의 오아시스 투르판. 근데 이제 그 느낌이 없다. 

척박한 사막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마을이 나타난다. 그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흙더미 성벽이 바로 고창 고성이다.

고창성 유적은 둘레가 5km, 흙성벽 밑부분의 두께가 12m 정도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최고 높이가 11m에 이르는데 처음에는 더 높았을 것이란다. 이 고창성은 흙벽돌을 쌓아 조성한 성이다. 그래서인지 파손이 심해서 궁전이나 사원 같은 큰 건물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 거의 폐허화된 도시유적이다. 

이 고창성이 만들어진 것은 후한(A.D.91년)때이다. 그 이전 전한 때는 투르판에 차사전국이라는 나라가 번창하고 있었ㄴㄴ데 한의 위협 때문에 흉노와 동맹을 맺어 흉노군이 투르판 분지에 주둔하면서 한과 대적하도록 했다. 그래서 한은 기원전 72년인 한 선제 2년에 전광명 등 다섯 장군과 20만 대군을 파견하여 흉노가 퇴각한 차사 전국을 일거에 함락시켰다. 당시의 수도는 내일 갈 교하성이었단다. 당시의 고창성은 조그만 마을에 불과했지만 한이 투르판을 점령한 뒤 고창에다 작으 ㄴ성채를 쌓고 술기교위로 하여금 5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게 한 이후부터는 번창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창은 후한 반초 장군이 서역을 통치하던 때에 크게 번성했고, 5호 16국 시절에는 하서의 전량이 군을 창설하였다. 그후 5세기부터는 고창왕국으로 부상했는데 북위 효문제 때에는 중국인 국씨 왕조가 개국하게 되었다. 이른바 중국인들이 '국씨고창국'이라 하는 나라인데 이 때가 고창국으로서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던 시대이고 고창고성도 최전성기였단다.

현장 법사가 고창성에 온 것은 630년 2월경으로 그후 약 1개월 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고창시가지며 인근의 불교사원들은 대개 둘러 보았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이 고창성은 흙벽돌로 구축한 사각형 성곽도시로서 둘레 1km의 궁전지 주위로는 많은 사지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가운데 궁전 가까이에 있는 거대한 절터가 가장 유명한데 사원의 기본구도는 인도식이란다.

우리는 이 고창성의 입구에서 마차를 타고 돌았는데 가장 유명하다는 커다란 사원에서 마차는 최종적으로 섰었다. 방문한 관광객들도 모두 이 곳에서 머물렀고.. 우린 한적한 사원 담벼락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의 사진을 찍어서 뽑아주면서 우리 마부의 사진도 한장 뽑아주었다. 그러자 마부는 더욱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까 그 곳에 20위안을 더 내고 가잔다. 우리가 No하자 그는 무료로 해주겠다며 가잔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더 간 곳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방형탑앞이었다. 그는 그 앞에서 사진을 한장 찍어 달라고 한다. 사진을 찍어서 빼주고 다시 돌아 나오는데 그 덕분에 좋은 볼거리를 본 대가로 20위안을 그에게 더 주었다. 그러나 그는 안받으려고 한다. 꽤 자존심 강한 마부다. 아니면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고...간곡히 주고 고창성을 떠나는 마음이 흐믓하다.

이 고창성에서 예전에는 말에게 진짜 묶어주는 말방울을 파는 어린아이들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별로 없고 파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말방울도 너무 조악하고 비싸서 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든다.우리는 생수만 한병사서 먹고 서둘러 아스타나 고분군을 향해 떠났다. 햇살을 더욱 강해지고 뜨거원지고 있다.

아스타나 고분군을 고창성을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무르툭계곡의 중간 지점 쯤에 있었다.

아스타나 고분군은 고창국시대와 당나라 귀족들의 공동표지였던 곳인데 수천의 분묘들이 동서 5km, 남북 2km의 사막에 산재하고 있다.

아스타나는 휴식과 영면의 뜻을 가진 위그루어로 영원히 잠든 묘지를 일컫는 말이다.

영원의 잠을 자고 있던 수백 기의 고분들은 1916년부터 스타인 등 서양 학자들이 도굴에 가까운 발굴을 시도한 이래 간헐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다가 1953년 이래 현재까지 중국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4백여 기의 고분이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단다.

분묘는 땅표면에서부터 지하묘도가 비스듬히 나 있는데 폭은 1.5~2m,길이 20m 내외의 크기였는데 우리가 들어가 본 것은 3기였다. 

고분군의 겉 모습은 그저 사막의 척박한 흙위에 약간 봉긋하게 흙더미가 올라와 있는 형태였다.

그 3기의 무덤안의 벽화들도 소박했고...그래서 우리가 접한 아스타나는 어쩌면 입장료가 아까운 그런 곳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

그렇지만 문명대 교수의 책을 읽다 보면 이 아스타나에서 발굴된 것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간 우루무치 박물관에서 본 몇가지 전시물만 보아도 만만치 않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아스타나를 떠나 이제 우리가 간 곳은 베제클릭천불동

세로로 습벽이 진 화염산을 지나 계곡 속으로 들어서면 양쪽의 깍어지른 산에는 기암괴석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협곡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베제클릭으로 들어가면 입구의 넓은 광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한쪽에는 생수 등을 파는 매점이 있고 반대편에는 화염산을 배경으로 낙타꾼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 광장  아래가 협곡이고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협곡 절벽 중턱을 따라 석굴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그 전경이 압권이다.

우리 일행 모두는 이 베제클릭의 배경을 이번 여행의 순위에 넣어 놓았을 정도니까...

베제클릭은 위그루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 57개의 석굴안에는 아름다운 소조 조각과 호화로운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어서 밖의 뜨거운 사막과는 달리 서늘한 굴실과 함게 극락으로 여겨지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굴실안에 들어서면 벽화들이 긁힌 자국 투성이에다가 떼어내간 참혹한 흔적이 대부분이었다.

이 베제클릭의 아름다운 불화들과 소조 불상들은 독일,일본 러시아,영국인들이 차례로 드나들어 마구 떼어가 현재 세계도처에 유랑하고 있고 전쟁으로 인해 사라진 것들도 많다고 한다.

이제 날씨는 점점 뜨거워져 우리도 일사병에 걸리기 직전까지 간 것 같다.

이 베제클릭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일과는 일단 끝이다. 서둘러 투루판으로 돌아오는데 기사는 이 더위에도 에어컨을 켜 줄 생각도 안한다. 어쨋든 돌아온 우리는 교통빈관 지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일단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호텔방에서 쉬기로 하였다. 시원한 방은 천국인양 싶다.

어느정도 해의 극성맞음이 사그러질 6시쯤 우리는 예전이 명성이 있던 투르판 빈관을 찾아 갔다. 가면서 구두 등 쇼핑도 하면서... 그러나 찾아간 투르판 빈관앞은 이미 사그라진 장소였다. 거리의 포도넝쿨만이 있을 뿐 관광객들도 야시장도 거리에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던 콸콸거리던 수로도 더이상 없었다.  나의 실망과 서글픔은 마음을 쑤셨고..

우린 다시 교통빈관 맞은편의 소박한 야시장을 찾아 구운 닭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이 야시장에선 맥주를 먹을 수 없단다. 술을 금하는 이슬람의 풍습 때문이리라. 할 수 없이 먹던 닭고기를 싸가지고 맥주를 사가지고 우린 숙소에서 조촐한 파티를 벌일 수 밖에 없었다. 9시가 다 되어도 주변은 밝다.

투르판 시내의 모든 것들은 변했어도 오늘본 유적지는 여전했다.

생각보다는 그렇게 힘들진 않지만 덥긴덥다.

돌아오는 내내 졸다가 졸다가 온 듯 다들 강렬한 햇살에 상당히 지친 듯. 경순은 아예 입맛이 없을 정도로 지친 듯 하다.

숙소의 식당에서 두부요리와 가지요리. 비빔면을 시켜서 점심을 먹고 휴식에 들어갔다.

샤워하고 빨래도 대충해서 널고 6시까지 글을 읽으면서 휴식

그리고 소공탑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 투르판의 기온은 최고 44도.

택시(10)를 타고 간 소공탑 동네에서 우리는 진정한 포도농원들을 온 몸으로 느꼈다.

정말 지열이 후끈 느껴지는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포도 농원옆 그늘은 서늘하기까지하다.

소공탑을 밖에서만 보고 우리는 그늘진 거리를 걷기 시작하였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아쌀라 하고 인사를 하니 대번에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오는 길에 포도 말리는 집의 지붕도 올라가보고 또 개업한지 2년 밖에 안되었다는 실크로드 롯지의 아름다운 실내와 정원 옥상을 둘러보며 스텝 청년과 즐거운 교류를 하였다. 그가 포도 농원의 포도른 마음껏 따 먹으라해서 한송이를 따왔는데 아주 달고 맛있다. 그와의 만남이 유쾌하다. 돌아오는 길엔 지나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시내로 나오게 되었다. 저녁은 해결 하러 투르판빈관의 야시장을 찾았으나 예전의 그 번성하던 야시장은 간곳이 없다. 투르판 빈관도 쇠락한상태로 있고 그 주변이 쓸쓸 하기 짝이 없다.

할수없이 숙소앞 야시장을 찾아 구운 닭고기를 사 먹고 맥주를 마시려 하나 맥주를 안판단다. 이들의 종교적이유 때문이다.

맥주를 사가지고 닭고기를 싸가지고 숙소로 와서 또 파티를 열었다. 우린 낼 우루 무치로 갈 예정이다.

★오늘 쓴 돈

입장료 40, 20,20, 교통비 택시비 230 , 10, 나귀 40×4=160 버스비 4, 음식과 물 15.5 음료수 20

하드 9 점심 44 저녁 44,수수 등 44  (총 660.5)

 

8월 3일 (토)

어제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잠을 자니 한시 반이 넘어있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잠을자다 깨어나보니 8시가 다되어있다.

날씨는 의외로 흐려 오늘 교하고성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고 내일치 방값과 보증금을 돌려받고 가방도 맡기고 쾌적하게 숙소를 나섰다. 물론 아침도 챙겨 먹었고.

숙소앞에서 101번버스를 타고(1원) 종점까지가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타고 교하고성으로 갔다.

투르판 시가지를 벗어나면 곧 넓은 포도밭이 펼쳐지는데 이 길을 따라 서쪽 10km쯤 가면 '냇물이 교차해서 만나는 곳이 나타나고 이 냇물을 건너면 30m나 되는 높다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

이 절벽은 전체가 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북 1,600m, 동서 330m의 대지 전체를 파고 뚫어 진흙 건축물로 구축한 것이 바로 교하고성이란다.

성문을 들어서면 벽돌길이 남북에 걸쳐 일직선으로 뚫려있는데 길이 끝나는 곳에 고아장과 거대한 사원지가 있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 곳에서 전체를 조망한 다음에 돌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곳을 시작으로 승방과 민가와 관청들이 있는 거리들을 한가롭게 거닐기로 하였다. 일단 대절한 차가 없으니까 시간에 제한받을 필요가 없고 날씨도 흐려서 땡볕에 일사병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교하성은 참으로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이 교하성의 사원 양식은 고창성과 마찬가지로 인도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단다.

이 지역의 역사가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은 전한시대부터인데 중국인들은 이 때를 차사전국이라 기록하고 있단다.

이 차사전국을 후견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흉노였는데 흉노는 한 소제때 투르판 부근에 4천기의 둔전병을 주둔시키면서 차사국으로부터 조공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는 흉노와 끊임없이 대적하고 있었는데 투르판이 서역일대의 세력판도를 가늠해주는 전략요충지로 판단되자 다섯명의 장군과 20만대군을 파견하였다. 그러자 흉노는 정면대결을 피하여 재발리 철수해버렸고 고립된 차사전국은 하는 수 없이 한에게 항복하게 되었단다.

당시 차사전국의 수도가 바로 교하성이었다고...

이 후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중의 하나로 번영을 누리던 교하 고성은 12세기 몽골의 침략을 받고 아예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단다.

거대한 돔형 건축,터널식 구조물, 좁은 골목길, 그리고 곳곳에 있는 우물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다니는 우리는 이 곳에서 평화를 느끼고 어느정도의 해방감을 느꼈었다. 옛 민가거리 사원 거리를 걷다보니 기분이 상당히 좋고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 수있어 좋다. 예전에 덥기도하고 시간도 없어 못했던 한을 오늘에야 푸는 듯

이 교하고성에서만 12시 가까이 있었던 듯 그다지 덥지 않은듯 했는데도 등에 땀이 흥건했다.

입구의 상점에서 수박 한조각(5원)을사서 막으며 쉬는데 입과 몸이 다 시원하다.

교하고성을 나오는데 엄청난 투어버스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루무치버스들이 많다. 입구에서 관리인이 택시를 불러주어서 타고 카레즈로 간다. 카레즈(40)는 일종의 지하 수로 박물관이었다.

지난번에 왔을때는 기사집 카레즈를 보았었는데 이번 카레즈는 입장료를 받는만큼 설명이 잘되어 있고 지하 수로를 직접 가 볼수 있어서 좋다. 지하 수로를 걷는내내 시원한 느낌을 한껏 받았다. 나오는 출구 바로 앞에서 즉석 포도즙을 짜주는데 맛이 아주좋다.

이제 아까 타고 온 택시를 타고 교통빈관으로.(40) 교통빈관 식당에서 식사른 하는데 이곳 국수가 쫄깃하고 고소하니 맛있다.

띵띵 면과 반면 그리고 가지요리도 맛있고 엄청 많은 양인 거 같은데 우린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55)

짐을 찾아 우루 무치행 버스에 오른것은 15시 10분이었다.

버스는 30분단위로 자주 떠나고 큰 에어컨 버스다. (45)

졸다가 눈을 떠보니 멀리 천산산맥의 흰눈이 보안다.

6시 30분 우루무치 도착. 버스 터미널은 여전히 정신이 없다. 나오자마자 삐끼들이 달라 붙는데 홍산공원까지 가는데 60원을 딜란다. 30원에 딜은 하고 길을 떠나는데 이 아줌씨. 우리가가는 맥전유스 호스텔이 홍산공원 보다 멀다고 10원을 더내란다. 그녀의 요구를 받아 주어 40원을 내고 내려 호스텔로 갔으나 방이 없단다. 그곳에 묵고있는 서양여의 추천으로 길건너 홈인빈관으로 갔다. 홈인의 방은 크고 에어컨 빵빵하고 깨끗하고....

가장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것은 와이파이가 비번없이 빵빵하게 잘된다는 것이다. 내일 나라티갈 따끈따끈한 정보를 마음껏 검색할 수있었다.

이집 5층에있는 식당의 서빙하는 소년들도 좋고 음식도 맛있다.

밤이 늦도록 검색을 해서 나라티를 가려면 신원이나는 마을을 거쳐거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시 반경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