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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나들이

창덕궁의 후원 산책.

2010년도 벌써 10월이 넘어서 9일된 햇살 밝은 토요일.

창덕궁의 후원을 거닐어 보지 않겠냐는 H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이 밝은 햇살속을 그냥 걷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잘 됐다. 싶어 선뜻 집을 나섰는데....

뜻밖에도 창덕궁의 후원은 매시간마다 100명씩 제한된 인원이 가득 가득 찬 상태로 들어가는 인기 캡인 장소가 되어 있었다.

창덕궁 입구에서 3,000원을 주고 입장권을 사서 일단 낙선재를 지나 중화당 터를 지나 가니 문이 두개 나왔다.

동쪽문은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이고 왼쪽문이 후원으로 통하는 문인데 그 중간에 후원 특별관람표를 파는 매표소가 있었다.

여기에서 또 5,000원을 주고 표를 사서는 안내인을 따라 들어가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1시간여나 있었다.

커피 한잔을 사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바로 옆 건물 뒷편에 앉아 고즈넉함을 느끼며 수다를 떨었다.

이제 오후 3시 30분.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앞에 가니 사람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고 생활한복을 입은 안내인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자 이제 사진을 보며....

 

 후원 특별관람 매표소 오른쪽이 창경궁 들어가는 문이고 왼쪽 철문이 후원 들어가는 문이다.

 후원들어가는 길은 커다란 담장사이로 나 있다. 오른쪽은 창경궁의 담장이고 왼쪽은 창덕궁의 담장. 시멘트로 포장을 하고 길도 차가 다닐 만큼 널찍하다. 흙길이 아쉬운 건 누구나의 마음이겠지? 

 시멘트길을 따라 고개를 조금 오르다 보면 이런 길이 나온다.

 그리곤 홀연히 나타난 아름다운 네모난 연못. 이 연못의 남쪽에 열십자 모양의 아기자기한 정자가 부용정인데 이따가 더 자세하게 보자.

 연못을 지나치면 이런 정경도 있고. 머리 아프니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요런 세월의 흔적이 마음을 적시는 담장의 기와도 보이고...

 이제 우리는 낙선재 구역으로 들어왔는데 남향으로 난 장락문으로 들어간다. 이 장락이란 글자 그대로는 '길이 길이 즐긴다'는 뜻이 되겠지만, 서왕모라는 할머니 신선이 살던 월궁의 이름이라고 하니 장락문 안은 신선의 세계가 된다는 뜻이 스며있다고 홍순민 선생님은 예전에 답사를 왔을 때 말씀하셨었다. 이 편액 글씨가 꽤 힘있어 보인다.

 낙선재 안.

 장락문의 일부.

 장락문이 일부

 낙선재안.

 낙선재.

 낙선재 뒤란. 이 뒤란은 대조전 뒤편의 화계만큼 크지는 않지만 자그마하나마 아기자기한 화계로 꾸며져 있다. 화계에는 꽃과 나무는 물론이요 이렇게 굴뚝도 있다.

 낙선재 툇마루에서...

 낙선재 마당에 있는 엄청 큰 나무 그 크기를 가늠해 보기위해 H님이 모델로...

 낙선재를 나오니 또 세월의 흔적이...

 이 작은 집은 그 모양이나 분위기가 여느 궁궐 건물들과는 사뭇 다른데 우선 가운데 마루에 양쪽으로 방이 딸리고 동쪽에 누마루방이 있는 정도로 규모가 단촐하다. 기둥에 창방이자 도리가 얹히고 거기에 바로 서까래를 걸친 민도리 형식인데다 물론 단청도 칠하지 않아 꺼칠한 느낌을 준다. 궁궐 건물이라기보다는 보통 민가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또 한가지 그 왼쪽 방향이 남쪽으로 산자락을 기대어 북쪽을 바라보는 형세라는 점도 특이하다. 마루에 붙은 편액은 기오헌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기오헌은 집 전체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마루의 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 한다. 기오라고 하면 오만한 데, 다시 말하자면 높은 어떤 데 기댄다는 뜻일 것이요, 북두성에 의지한다는 뜻일 것이니  그 이름 짓는 뜻은 서로 통하는 것 아닌가 한다. 이 집 서편에는 한 간 반짜리 작은 건물이 하나 있다. 무엇 하던 곳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이름 운경거로 미루어보건대 홀로 들어앉아 시를 읊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수련을 하던 곳이 아닌가 싶다.

이런 곳에 이렇게 독특하게 집을 짓고 이런 이름을 지어 붙인 장본인은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이다.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부왕 순조를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하는 대리청정을 하였다. 그 때 왕의 힘은 약하고 몇몇 가문의 대표자가 실권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세도 정치기였다. 효명세자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여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 정조의 마음을 헤아리며 규장각 뒷편 기슭에 독서처로서 이 기오헌을 지은 것이다. 실제로 기오헌 뒤로 계단이 나 있는데 그 계단을 올라 작은 문 둘만 지나면 바로 규장각이다.

 우린 기오헌을 지나 주합루 앞 연못 동변에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집인 영화당에 왔다. 영화당은 이 일대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선조, 효종 현종,숙종의 글씨가 붙어 있었다.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영화당은 이렇게 여러 왕들이 이 곳에 들러 연회를 한 흔적이 많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왕과 신하들이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참관하거나 직접 활쏘기를 하기도 하엿다. 하지만 이 일대는 왕과 관련이 깊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유명한 곳이었다. 관원이 되는 것이 양반 신문을 획득하고 보장받는 데 가장 긴요한 일이었고, 관원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필수적인 경로였던 시절에 이곳은 몇 단계로 되어 있는 과거 절차 가운데 최종 시험을 치르는 곳으로 자주 쓰였단다. 그러니 과거 공부를 하던 선비치고 이 곳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전에 왔을 때는 이 영화당 안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앉아 쉬면서 전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요즘 성균관스캔들이라는 드라마 때문에 더욱 각별하게 보아지는 장소였다.

 부용정, 이 연못은 상당히 크다. 네모진 호안은 장대석으로 쌓고 한가운데 동그란 성을 만들어 소나무를 심었다. 전형적인 방지형태의 연못이다.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그저 하늘과 땅의 모양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으니 사람은 하늘과 땅의 운행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소우주요. 따라서 하늘의 뜻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인간관도 내포하고 있는 사상이다.

 주합루의 담장 취병-아래가 취병에 대한 설명.

 

 부용정

 주합루의 어수문-주합루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 있는 작은 문의 이름이 어수문이다. 어수-물고기와 물. 물고기란 신료들을 가리키고 물이란 왕을 가리킨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신료들도 왕의 뜻 안에서 활약하라는 뜻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물고기들 가운데 더욱 도약하여 이 문으로 올라오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어수문은 기둥 두 개로 지붕을 받치는 일주문 형태를 띄고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래도 팔작 지붕 형태에 겹처마요 단청이 화려하다. 청룡,황룡 한쌍이 문미를 휘감고 있다. 쌍용이 꿈트러져 있는 이 문을 아무나 드나들 수 있겠는가? 왕만이 이 문을 드나들 수 있을 뿐이요. 신하들은 어수문 옆의 장난감처럼 작은 문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다. 그 문은 문틀 위쪽이 활처럼 굽었는데 어른이 서면 머리가 닿을 만한 크기이다.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니 이리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어수문으로 오르는 계단의 양 옆을 막은 소맷돌은 무지개 모양인데, 그 옆면에는 구름 문양이 새겨져있다. 이 계단을 밟고 어수문을 들어서는 것은 무지개를 타고 구름위의 세게로 올라섬을 뜻한다.

 어수문을 들어서 계단을 몇 숨 오르면 주합루 기단을 오르는 계단이 있는데 그 소맷돌에는 더 많은 구름 문양이 있단다. 그러나 안에는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훔쳐볼 수 밖에... 한층 더 높은 곳임을 암시 하는 집. 주합루는 그렇게 높은 집이다.

지금은 흔히 건물 전체의 이름으로 주합루라 부르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합루는 그 건물의 이층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 건물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시절에 일층의 이름은 규장각이었다. 규장각이란 잘 알려진 ㄷ로 정조가 세운 기구로서 그가 탕평 정책을 추진할 때 그 중추가 되었던 기관이다. 1776년 3월 경희궁에서 즉위한 정조는 즉위한 지 석 달쯤 지났을 때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짓도록 명하여 다시 석 달 뒤인 9월에 규장각을 완공시켰다. 정조는 애초에는 왕의 글이나 왕실의 족보,물품을 보관하던 작은 서고에 지나지 않던 규장각을 국내외의 도서를 다수 소장한 왕립도서관으로, 다시 그것을 가지고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연구소로, 그 인물들이 성장함에 따라 왕의 비서실, 정책개발실, 감사실,출판소 등으로 기 기능을 확장시켜 나아갔다. 그리하여 규장각을 자신이 탕평 정책을 추진하는데 중추기구로 삼았다.  정조대의 규장각은 전기 세종대의 집현전과 더불어 조선왕조 양대 치적의 산실이 되었다. 

 부용정, 이 연못은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저 땅만 판다고 해서 연못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연못이 연못으로서 있을려면 물이 있어야 하고, 물은 한 번 채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새 물을 넣고 헌 물을 빼내서 순환을 시켜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려면 어디 물이 들어오는 데가 있어야 하는데 이 연못은 그럴 만한 곳이 없다. 서북 모퉁이에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는 형상의 카다란 물고기인지 용인지 집승 머리가 조각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마른 개울, 비가 오지 않으면 들어올 물도 없다. 그런데도 지금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다. 그 비밀은 바로 자체 땅 속에서 솟아난다는 데 있다. 원래 이곳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세조 때 우물을 네 개나 파고 그 이름을 마니,파려,유리,옥적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두 우물만 남고 그마저 쑥대밭이 되었기에 1690년(숙종16)에 두 우물을 수리하게 하고 그러한 연유를 비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 연못의 서쪽에 있는 그 비각을 지금은 사정기비각이라 하는데 본 이름은 술성각이다. 그 뒤 1707년에 그 우물 자리에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택수재라고 하는 집을 지었다. 그러다가 정조 초년에 연못을 다시 고쳐 만들면서 택수재도 함께 고쳐짓고 이름도 부용정으로 고쳤다.

 

 부용정은 평면 구성이 열십자 모양을 하고 잇다. 지붕도 따라서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추녀 부분의 서까래 구성이 무슨 구성 작품을 보는 것처럼 감칠맛이 있다. 마루 주위에 난간을 둘렀고, 들어올릴 수 있는 분합문 내부에는 다시 불발기창이라 하여 사람이 앉은 눈높이 정도에 팔각형의 창을 낸 문을 달아 복도와 방으로 구분하였다. 바닥의 높이도 달라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한 뼘 정도 높은데 그 부분은 돌기둥을 물 속에 박아 주춧돌로 삼앗다. 북쪽에 한 단 높은 자리는 곧 왕이 앉는 자리임을 알려준다. 그 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면 물 위에 떠 있는 듯 색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부용정에서 연못 건너 주합루를 바라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연못에 비친 영화당.

 연못 서북 모퉁이의 물고기 인지 용인지의 형상. 물이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

 옛 과거장이었다는 마당.

 영화당을 나서서 왼편으로 산자락을 끼고 후원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담장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문이 둘이 나 있다. 첫 째것은 보통 보는 기와지붕을 하고 있고 금마문이라는 편액이 달려있다. 둘째 것은 커다란 바위를 'ㄷ'자로 깍아서 문들을 만들어 문짝을 달았던 듯. 지금 문짝은 없지만 돌쩌귀 박았던 흔적이 잇다. 돌로 된 문들에 전서체로 불로문이라고 새겨있다. 늙지 않는 문, 우리도 이 문을 지나쳐 가고...

 후원에서..

 후원의 한 연못.

 후원의 한 연못에서

 후원에서...

 반도지에서..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

 이 반도지는 자세히 보니 한반도 모양이라고 신기해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 방향 때문일까? 반도지는 지도상의 북쪽 함경도 평안도 부분이 남쪽으로, 경상도 전라도 부분이 북쪽으로 향하여 누워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이 이 연못을 팠다면 이렇게 했을리가 없다. 기실 더 이상한 것은 연못의 모양 그 자체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연못 형태에는 주합루 앞 부용지나 애련정이 있는 태액과 같이 방지가 많지만, 호안이 곡선으로 되어 있는 곡지도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렇게 반도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은 어디 또 다른 예가 있는지 들은바 없다.

 존덕정.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지붕이 겹으로 되어 있고, 내부 치장이 화려한 가운데 천정에는 어수문 문틀 위에서 보던 것과 닮은 청룡,황룡이 어우러져 있다. 이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정자의 북쪽 창방 위에 달린 나무판이다. 그 나무판에는 글씨가 빽빽이 새겨져 있는데 그 제목이 '만천명우러주인옹지서'이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그 요지가 '뭇 개울들이 달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하늘에 있는 달은 오직 하나뿐이다.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다. 그러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만하다고 할 자신을 드러낼 사람은 누구인가. 왕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고 왕가운데서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왕이라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지은 사람은 정조이다. 정조는 이런 글을 짓고 신하들에게 쓰게 하고 그 가운데 몇을 뽑아서 이렇게 나무판에 새겨서 여기저기 걸어 두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거기 존덕정 내부에 빛 바랜 채 남아있다.

 존덕정 천정. 청룡,황룡이 어우러져 있다.

 내부 현판에 적힌 글 해석.

 존덕정과 반도지를 흐르는 물.

 존덕정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옥류천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궁성이 막아서는데 그 너머는 성균관, 지금의 성균관 대학교이다. 서북쪽에서 작은 개울이 흘러 내려와 봉긋이 솟은 바위를 감싸고 돌아 한 길 조금 못되는 폭포를 이루었다가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그 주변에는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청의정 등 정자들이 서로 마주보며 배치도어 있다.

그런데 창의정 단청을 찍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의 디카 밧데리가 끝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옥류천 사진은.......

옥류천은 풍광이 장대하지는 않으나 왕이 신하들과 와서 놀기에는 분위기가 아기자기하다. ...폭포 위 바위에는 인조의 친필로 '옥류천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숙종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폭포수 삼백 척을 날아 흘러

아득히 구천에서 내려온나

보고 있노라니 문득 흰 무지개일어나고

일만 골짜기에 우뢰 소리 가득하다.

 

▶ 위 내용의 많은 부분은 '우리 궁궐 이야기/홍순민/청년사'에서 많이 참고 했습니다.

창덕궁 후원 산책은 사람들이 좀 적었으면 한적하니 훨 좋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워낙 알려져서 주말이면 시간 시간마다 사람들로 가득하여 한적함을 못 느끼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