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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나들이

떠돌이 시간여행하며 서울을 돌다.

빨리 올리려고 했는데 벌써 두주가 지나버렸네요.

지지난 주 토요일 오랫만에 친구를 만나 광화문으로 진출했었습니다.

일부러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광화문 시네큐브를 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맞는 영화가 없는 관계로 영화는 못 보고... 그대신 맞은편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하는 "세 이방인의 서울 회상"이라는 전시를 보았습니다.

처음 전시실에 들어서면서는 환경호르몬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느낌에 눈이 따끔거려서 뛰쳐 나오고 싶었지만 차츰 전시된 사진이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면서 따끔거리는 눈의 고충을 참게했습니다. 사진은 찍어도 되더군요.

전시된 사진을 찍은 거라 그다지 화질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올려 보겠슴다.

 

아래는 서울 역사 박물관 홈피에서 퍼온 개요와 인물 소개구요.

전시개요
우리는 서울의 모습이 외국인의 시선 속에서 보다 진실하게 규정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이라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풍경들이 외국인의 눈에는 새롭고 이국적이며 독특한 모습으로 재발견되고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 약 30여 년간의 간격을 두고 서울을 경험했던 세 명의 이방인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 프레드 다익스(Fred W. Dykes), 그리고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가 기록한 옛 서울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들이 방문한 서울을 사랑하게 되면서 소중한 필름으로 한 컷 한 컷 기록하게 된 것은 우연이겠지만,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서울에 남겨지게 된 것은 아마도 필연인 듯합니다.

세 분의 기증자는 아마 평소 서울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당시 서울에서의 생활을 회상하고 추억했을 듯합니다. 생각 끝에 서울로 돌려보내는 것이 순리라고도 여겼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대를 달리하는 서울사진들이 서울역사박물관에 모이게 되었고 전시를 통해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옛 서울을 회상하고 음미하는 자리에 시민고객 여러분들을 정중히 초대합니다.

시간을 초월한 이방인들의 시선 속에서 새록새록 회상되는 서울의 옛 추억에 젖어 보시기 바랍니다.

1919 앨버트 테일러의 한국사랑

 테일러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는 금광개발업자이자 UPA(UPI의 전신)의 특파원으로 서울에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그는 1919년 3·1기미독립선언과 제암리 민간인 학살사건을 외부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 이후로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그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석방된 후, 테일러 씨는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1948년 숨을 거둘 때 사랑하는 한국 땅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현재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 묘소에 안장되어 있다.

서울파노라마

한국을 사랑한 서방언론인의 시선
앨버트 테일러의 사진은 UPA 특파원으로서 취재 중에 수집하고 촬영한 것으로 서울의 파노라마 사진원본과 미공개 고종국장 사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1920년대 말 서울의 전경을 찍은 파노라마 사진은 당시 서울을 감싸안고 있던 도성의 윤곽을 한눈에 보여준다. 또한, 고종국장사진은 이전의 공개된 사진들이 장례행렬 위주인 것과 달리 국장행렬에 모여든 조선인들의 모습을 주로 담고 있어 당시 고조되던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전하려는 시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딜쿠샤(Dilkusha)     
앨버트 테일러와 부인 메리 테일러가 거주하던 가옥으로 서대문구 행촌동에 있는 붉은 벽돌집이다. 테일러 부부는 이 건물이 건립된 1923년부터 추방되던 1942년까지 거주하였다. 건물 초석에 ‘DILKUSHA 1923’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DILKUSHA는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메리 테일러의 회고록 “CHAIN OF AMBER”에는 이 집에서의 삶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많은 가구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  1947 벽안의 미군병사, 프레드 다익스

프레드 다익스(Fred W. Dykes)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8월에 18세의 나이로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4개월여를 미 본토에서 복무한 후, 미 7사단 31보병연대 소속으로 1946년 12월부터 1948년 5월까지 총 17개월을 서울에서 근무하였다. 전후 미군정 주둔군의 일원으로서 서울의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다익스

 지난 2005년 약 60년 만에 다시 서울을 방문한 다익스 씨는 옛날 보았던 서울시청, 서울역,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로 수많은 건물들이 서울 시내를 뒤덮고 있는 발전상에 매우 놀랐고, 당시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 일체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주탑

프레드 다익스의 서울 유람
미군병사 프레드 다익스는 낯선 주둔지였던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담담하고 관조적인 관점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의 주요 대상지역은 용산의 7사단 31연대 영내, 군정청, 서울시청, 덕수궁 등 자신이 근무했던 지역과 남산, 남대문, 동대문, 파고다공원, 원구단 같은 사적지가 대부분이다. 인물도 롱샷을 사용하거나 군중의 형태로 촬영되어 대상지역이나 촬영방식에서 모두 프레드 다익스의 관조적 시점이 잘 드러나 있다.

□  1973 청계천의 일본 독지가,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노무라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는 목사이자 사회운동가로, 일본내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목격하고 한국인에 대한 봉사활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한국인 차별이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노무라는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으며, 1973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하며 빈민구호활동을 폈다. 봉사활동의 바쁜 일정 중에도 틈틈이 청계천을 비롯한 서울 도심의 모습을 담아낸 사진은 노무라의 인류애적인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삼륜차

청계천

노무라 모토유키가 본 고도성장기의 빛과 그림자
1970년대 서울은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빠르고 압축적인 성장을 경험하던 시기였다. 노무라의 사진에는 당시 서울도심의 활기찬 모습과 함께 청계천의 어두운 현실을 가감 없이 기록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의 사진을 통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던 빌딩숲, 지하철 공사현장 등 고도성장을 하고 있던 서울의 모습뿐만 아니라 청계천변 판자촌의 서글픈 장관과 그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우리들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