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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그 푸르름을 다니다.

우붓,길리뜨라왕안,자바섬의 솔로

 우붓의 동네 유지 장례식, 보기드문 30일 장이었다. 이 사진은 필카로 찍을 것을 스캔한 것이라 화질이 영...

나의 사랑하는 펜탁스는 발리의 모든 사진-그곳엔 발리의 아름다운 풍광과 축제 등 귀중하고도 아까운 사진이 엄청 많았다.-

과 길리섬의 아름다운 풍광, 또 자바섬 솔로의 그 한적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자꾸 안타까움이 커져 아름답다라는 말이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들을 모두 한순간의 클릭으로 삭제해 버리고 말았다. 난 이 쓰라린 사건 이후 나의 펜탁스를

미련없이 버리고 캐논으로 마음을 옮겨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아직도 난

소유의 미련을 못 버렸던가?

 우붓 장례식-이곳에서 우리 나라 장례식처럼 음식도 얻어 먹었다. 약밥같은 것도 있었다.

 우붓장례식- 어린 소년 상주-

  우붓장례식-관이 올라가고 있다. 이동네 사람 모두와 우리처럼 정보를 듣고 온 관광객들이 참여한 장례식이었다.

1월 6일(월)

쓴돈: 사롱-15000루피, 점심-22000루피, 저녁-4200루피, 음료수(과일쥬스)-9000루피


11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숙소 근처 식당에 가서 아점을 먹었다.

식당옆 가게에서 사롱을 하나 샀다.

오늘은 쉬는 것이 목적이다. 다시 들어와 쉬다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였다. 저녁 바다를 보러 나갔다가 저녁을 먹고 전화를 하고 그런 것이 오늘 하루 한 일의 전부다.

그래도 11시가 넘어서야 잠을 잤다.


1월 7일(화)

쓴돈: 맛사지-30000루피, 온천교통비-20000루피, 입장료 3000루피, 점심-12000루피,

     저녁 22000루피

8시쯤 아침을 먹고 바닷가에 나가 흑단으로 된 돌고래한쌍을 샀다.

바닷가 호객행위를 하는 아주머니한테 코코넛 오일 맛사지를 받았는데 오일 맛사지는 미적지근한 것이 그저 그랬다. 들어와서 잠시 쉬다가 점심을 먹고-점심을 먹으러 간 수르야 레스토랑은 사람도 없고 별로였다.- 점심을 먹던 도중 쨍하고 햇살이 비추던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스콜현상이 일어났다. 한 20분쯤 비가 내렸을까? 다시 날씨는 맑아진다.

점심식사 후 근처 온천을 갔다. 온천가는 길은 남쪽나라의 농촌 모습이 보인다. 키큰 야자숲들에 둘러쌓인 온천장 입구엔 기념품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고 옥외 온천은 역시 야자숲에 둘어쌓여 운치가 있었다. 입장료는 3000루피이고 비누와 샴푸는 쓸수가 없고 락카룸을 빌리는 데 2000루피였다.

물은 미지근했지만 생각보다는 즐겁다. 뜨듯한 물방방이를 밪는 것도 좋고 달걀냄새가 어렴풋이 나는 것도 즐거웠다. 돌아오는 길에 운전기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차를 1인당 20000루피에 빌렸는데 자기는 40000루피밖에 못 받았다며 숙소 여자가 돈 욕심이 많단다. 내일 우붓가는 걸 싸게 해 주겠다면서 가지에게 맡기라고 한다. 자기는 학교 영어교사라며 부업으로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부인은 지리교사란다. 교사가 적은 월급을 받고 있나보다. 수업이 오전에 끝나고 오후엔 부업을 해야하니....

숙소로 돌아오니 5시다 수영장이 아까워 다시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에 들어갔다. 몇 번 발차기를 하다보니 민경샘의 친구 선화씨 일행이 들어온다. 쑥스러움에 얼른 옷을 갈아입고 함께 바다로 나갔다. 바다는 어제보다 활기차보였다. 사람들도 석양을 보러 나와있고 어제 보지 못했던 돌고래상도 보인다. 한참을 석양을 기다리다 날씨탓으로 오지 않을 석양에 미련을 끊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선 오랜만에 커다란 생선을 통째로 요리한 것을 먹고 쥬스도 마시고 식사도 한가지씩 시키면서 푸짐하고도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거금 220300루피가 나갔다 그래보았자 우리돈으로 33000원이었다. 이 돈으로 8명이 포식을 한 것이다.

깜깜한 해변이 8명에겐 무섭지 않았다. 밤바다는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내일은 우붓으로 간다. 우여곡절 끝에 우붓가는 길을 선화씨 일행이 타고 온 차에 끼어 가기로 하였다. 우리가 렌트비 반을 지불하기로 하고... 차는 새차였고 일단 성능이 좋은 일제였다. 끼여타도 우리 뜻대로 하니 좋을 거 같다. 방을 배정하고나니 어느새 10시다.

선화씨 일행과 함께 온 홍지호샘은 겁이 많다. 그런데도 혼자 과감하게 여행을 떠나 온 것이 신기하다.

낮에 스콜을 만다 미처 걷지 못한 빨래가 끕끕하고 방안도 후덥지근하였다.

밤에 목이 말라 호텔 프런느 생수 통에서 2000루피에 물을 사서 먹었다. 혹 나쁜 물일까봐 걱정되지만 확인해보니 아쿠아 상표가 보여 그냥 마신다.


1월 8일 (수)

쓴돈 : 입장료-10000루피, 물 및 기타-6000루피, 점심-52000루피, 차량비-30000루피,

      저녁 45000루피

아침을 먹고 나서 짐을 챙기고 떠난 시간이 9시였다. 꾸따에서 빌려온 도요다는 생각보다 훨 쾌적하였다.

뒷 좌석에 배낭을 쿠션삼아 앉으니 허리가 오랜만에 쾌적하다. 민수(운전사),재호,홍지호샘,황샘,민경샘, 선화씨, 승분샘,나 이렇게 8명이 한 차에 탄 것이다.

차안엔 오랜만에 한국노래가 흐르고 바깥 풍광은 아름답다. 한참의 고갯길을 오르던 차는 낀따마니에 이르고 부투르호수에 도착하였다. 부투르호수에선 관광객이 뜸한지 수많은 호객꾼이 몰려들어 물건을 사 달라고 조른다. 팔찌하나를 2000루피에 사고나니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것도 사달라고 난리다.  그들과 장난을 치며 거절하니 함께 웃으며 말려들어온다. 그 들과 이야기 도중 배를 타고 호수 건너 마을에 가면 풍장을 하는 시체를 볼 수 있다고 하여 가보려 했으나 시간도 없고 보트비용도 비싸 그만 두었다. 호수에서 나와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찾았으나 넘 비싸다. 호화로운 낀따마니 식당은 전망은 훌륭하나 뷔페가 79000루피다. 그냥나와 근처의 다른 식당으로 가니 그 곳은 그다지 좋지않은 뷔페가 40000루피였다. 어쨌든 먹고 계산을 하려니 세금도 67000루피나 붙어버렸다. (8명에)

어쨌든 인도네시아에 와서 가장 비싼 식사를 한 셈이었다.

밥을 먹고 길을 떠난지 얼마 안되어 작은 힌두사원을 만났다.

민수-인도네시아에서 20여년을 산 28살의 청년, 한국말도 아주 잘하고 영어, 인니어에 능통하다.-의 설명으로라면 인니의 힌두사원은 보통 3개의 문을 가지고 있는데 가운데 문이 의식용 문이란다. 또 사원안에는 절표식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것은 소우주를 묘사한 만다라 표식이란다. 쁘람바난의 힌두사원에서처럼 이곳에서도 불교의 흔적이 보였다.

만다라--- 티벳에서 수많은 만다라를 보았었다.

사원앞의 민가에서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친절하고 깨끗하였다.

다시 차를 타고 가다가 사람들로 북적이고 닭을 가지고 서로 겨누는 모습들이 보여 차를 세우고 내렸다. 마을제사란다. 여자들은 꽃과 과일 등을 장식하고 있었고 남자들은 고기를 썰면서 제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와중에도 이방인에게 친절하고 순박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정겹다. 사진을 찍어주니 아주 즐거워하고 양고기 사떼까지 먹으라고 준다. 제사 준비를 구경하다 밖으로 나와 닭싸움을 구경하는데 사람들이 돈을 걸었다. 싸움판에 내몰린 닭들은 발에 칼을 묶었다. 닭싸움은 순식간에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면서 판가름이 나 버렸다.

진 닭은 제물로 쓰여진단다. 닭싸움이 끝난 후 다시 차를 타고 달리니 금새 우붓이다.

원숭이 숲에가서 원숭이들과 즐겼다. 입구에서부터 원숭이들이 엄청 많았다. 재호가 바나나를 사오니 서로 달려들고 길가에 앉은 여인의 머리,어깨위로 올라가는 등 재롱을 피우다 자기들끼리 격렬하게 싸우기도 한다. 바나나 껍질 벗기기와 껌껍질 벗기기가 능숙하였다. 원숭이 숲은 나무가 많아 눅눅한데 우기라서 더욱 축축한 것 같았다.

숲에서 나와 우리가 마음속에 정해둔 원숭이숲로드에 있는 만디아 방갈로우를 찾아 헤메었다. 일방통행길이라 못찾고 세 번을 돌아와야만 하였다. 간신히 찾은 만디아는 예쁜 정원이 있는 방이 아담한 집이었다. 침대가 더블하나 싱글하나 있고 욕조와 까만 자갈이 깔린-더운 물도 나온다.- 방 두 개가 170000루피였다. 민수일행을 꾸따로 보내는데 비가 퍼붓는다. 간신히 빠당요리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요란스런 끼꾸소리와 비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


1월 9일

쓴돈 : 점심-100000루피, 저녁-80000루피, 사롱-35000루피,개미약 등-20000루피,

      입장료-20000루피


소문대로 숙소의 아침은 맛있었고 정성이 들어갔다.

여유있게 먹고 10시가 다 되어서야 숙소를 나섰다.

시장 맞은편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에 가서 대충의 투어를 알아보고 뿌리 루끼산 미술관에 들어가 힌두그림 등 발리의 전통 미술에 대해 공부했다., 지옥도 등 불교와 비숫한 그림도 있었다. 발리인의 생활풍속도도 보인다. 그림은 꽤 수준급들이다.

미술관 정원이 아름답고 대나무로 된 악기 소리가 듣기좋았다. 미술관에서 나오니 날씨가 무지덥다. 식당을 찾아 헤메이다 Big Cremation-가이드 북에 이 빅 크리메이션이라고 여행사 앞에 써있으면 우붓의 보기 힘든 전통 장례식을 볼 수 있으니 꼭 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 기회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라고도 하였다. 여행사에 알아보니 그 마을의 아주 높은 사람이 한달전에 죽어서 내일 장례절차를 밟아 화장을 한다고 하였다.-이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한 여행사 앞에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순간 우리는 흥분하였고 내일 장례식에 갈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데 양도 적고 맛도 그렇고 가격도 비쌌다. 식당을 나서는데 또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한다.

숙소앞 프라다 매장에서 가방을 하나 샀다.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숙소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여행사에 가서 내일의 장례식 장소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꾸따에서 민수가 차를 빌려오기로 하고...별로 한 일은 없는데 시간은 흘러 저녁 먹을 시간이다. 우붓에선 저렴하면서도 맛이 있는 식당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럴 땐 나시고랭이 제일 만만하다.  나시고랭을 먹고 맥주를 마시느라 레공댄스 공연에 늦어버렸다. 거리를 걷다보니 공연소리가 난다. 비속에 길거리에서 구경하였다. 라마야나와는 다른 느낌의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사롱 2개를 샀다.

별로 한 일이 없는 오늘도 정신차려보니 10시가 넘었다. 내일의 장례식이 기대된다.


1월 10일(금)

쓴돈 : 차량비-150000루피, 저녁-160000루피, 입장료-10000루피, 물-6000루피,

       가이드비-10000루피  숙박비(3일치) 102000루피


새벽부터 일어나 시장을 갔다. 6시 50분 숙소를 나섰는데 길에는 벌써 학교를 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오토바이에 아이를 태워다 주는 부모도 있었고 엄마손에 이끌려 학교를 오는 아이도 있었다. 숙소 맞은편에 있는 학교는 규모는 작지만 아이들은 꽤 있는 학교이다.

시장은 벌써 활기차 있었다. 과일상, 고기점, 잡화점, 채소점 등이 꾸리꾸리한 냄새를 피우면서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의 원숭이 숲 로드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바나나와 망기스를 사서 들고 아침의 시장구경을 끝내고 돌아왔다.

아시아 각 나라들의 시장의 풍경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이 곳 인도네시아 지상의 모습은 더욱 꾸리꾸리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허지만 공통점은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만디아의 아침 식사는 어제와 달랐다. 바나나와 파인애픙이 들어간 재플과 과일, 그리고 차. 참 정성스럽게 예쁘게 만들어준다. 청년도 좋고....

10시쯤 민수가 차를 가지고 왔다. 숙소 입구에서 나오는데 여행사의 운전수가 우리를 찾으러 왔다. 순간 어제 극성스럽게 물어본 것이 미안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조건 민경샘에게 밀어붙이고...

결국 그 운전수가 운전을 하여 우리를 장례식이 있는 마을까지 안내해 주기로 하였다. 가기전에 고아가자를 먼저 들르자고 하였다. (입장료 4000루피)

고아자자엔 관광객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 관광객들의 거의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코끼리 동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원은 석굴 사원인데 석굴 바로 앞에는 목욕탕이었던 자리가 있고 6개의 여성 상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사원은 힌두 또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하였다. 석굴 안에는 3개의 링감이 있고 목욕탕 옆 계단을 내려가보니 몇 개의 조각들이 부서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마 화산 폭발 때 쓰러져 버린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보기도 한다.

고아가자에서 나오니 상점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가죽제품이 많이 있었다.  가방 등

이 곳에서 잘 하면 아주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하는 데 시간이 없다.‘

이제 곧바로 마을을 찾으러 갔다.

한 20분쯤 달렸을까? 조용한 마을에 차들이 잔뜩 늘어서 있고 마을사람들의 옷차림이 검은색 일색이다. 우리도 사롱을 걸치고 장례식에 참여할 준비를 하였다.

가이드에게 이 지방 장례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걸어가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화려하게 치장한 상여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가믈란 음악이 조용하게 흐르고 있다. 장례식이 슬픈 분위기라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축제라는 기분이 들게하고 있었다. 상여옆에 있는 집안으로 들어가니 가믈란 악단이 있고 그 곳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떡과 약식, 그리고 땅콩과 물을 나누어 준다. 맛과 모양이 우리네 것과 똑같다. 마다안에는 흰띠를 머리에 두른 사람들로 가득찼다. 어느새 사람들이 두줄로 늘어서 머리위로 기다란 흰천을 늘어뜨리고 그 천위로 제물들을 옮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관을 옮기고... 관이 길가에 세원둔 화려하고 높은 상여에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고인의 어린 손자-고인은 이 곳 마을의 종교적 지도자의 아들이었다. 나이는 52세였고, 후계자였는데 죽었다고 한다. 이미 죽은지는 한달이 되었고 이제 곧 그의 아들이 후계자가 될 것이고 정부에서도 그를 공무원으로 인정해 줄 것이라고 한다. -가 상여의 높은 자리에 경직된 얼굴로 앉혀졌다. 곧이어 마을의 사원으로 상여가 옮겨지고 사람들은 길게 줄을 지어 따라갔다. 상여뒤로 여자들이 화려한 원색의 제물을 머리에 이고 따라가고..... 한참을 따라가다보니 흰천으로 만든 소가 우뚝 서있었다.

유족들은 소위로 올라가서 뚜껑을 열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른 몇 몇 유족들은 관을 들고 몇바퀴 소 주위를 돈다. 그런다음 네모난 관을 뜯어 대나무에 감싼 시신을 소위로 올려가고 소위에서 대나무조차 떼어내어 시신을 소안에 넣고 그 다음에 고인의 유품을 넣는다. 그 다음 성수와 쌀, 성유를 차례 차례 부어 넣었다. 10여명의 서양관광객들이 드문 드문 섞여있었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은 너무도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가족인 듯한 사람 몇몇만이 눈물을 흘리고 있고..... 드디어 소위를 다시 덮개로 덮고, 기름에 절인 야자나무 둥치를 소다리에 차곡 차곡 쟁이더니 가스관을 이용하여 힘껏 불을 붙였다. 소배에서는 성유가 뚝뚝 배어져 나오고 있어 순식간에 소 전체에 불이 붙더니 관이 뜯겨져 나가고 불에 탄 고인의 시커먼 두발이 보이면서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주변의 보는 사람들도 소리를 질러대고....

가스불의 위력인지 시신은 순식간에 타들어가고 있었다. 공개화장! 기이한 체험이었다.

화장이 거의 끝나가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뜨고 있었다. 우리도 인도네시아 기사의 재촉으로 서둘러 나오고 마을 입구에서 또 단체사진을 찍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상념에 젖었다. 죽음이 무엇일까? 한 인간이 죽어 그냥 시커멓게 타서

재가 될 뿐인데 저토록 화려한 의식을 거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붓 뿌리 루키산 박물관 근처에서 기사는 내리고 우리는 석양이 아름답다는 사원, 바다위에 떠있는 사원 따나롯을 찾아갔다. 물어 물어 찾아간 따나롯은 완연한 관광지였다.

처음의 인상은 부산의 태종대 정도였다. 석양을 바라보는 레스토랑도 역시 비쌌다.

전망좋은 장소는 다 레스토랑이 차지하고 있다.

일단 나시고랭으로 요기를 하고 바닷길을 걸어 따나롯 사원으로 갔는데 밑의 동굴까지만 가고 위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 바닷길을 걸을 때 전통옷을 입은 남자들이 물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고 동굴에서는 이마에 쌀을 붙여주고 귀에 흰꽃을 꽂아준다. 기부금 5000루피를 내고 성수를 마셨다. 다시 바다를 걸어나오니 해가 지려하고 있다. 바닷물은 깨끗하다.

지는 해는 우리의 서해안처럼 붉은 것이 아니라 하얗다. 빛나는 하얀색. 공해가 없기 때문일까? 흰 일몰도 나름대로 아름답다.

일몰을 보고 다시 차를 타고 차량통행이 많은 덴파사르를 거쳐 우붓으로 돌아왔다. 우리를 원숭이 숲 거리에 내려준 민수 일행은 다시 꾸따로 돌아가고 우린 롬복행을 예약하러 갔다가 시간상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아 롬복(민경,승분샘만)을 포기하고 꾸따로 가기로 하였다.

재호가 롬복가지 말고 꾸따로 오라고 한 말대로 된 셈이다.

͙炴͛烌͛烤͛焔͛烼͛煄͛煜͛煴͛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인도네시아가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이번 여행의 아쉬운 점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관광지( 시간문제가 있어서지만)만을 다니다 보니 진정한 현지인의 삶을 접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방안엔 여전히 개미가 많고 첫날처럼 끼꾸는 극성스럽게 울지 않는다.

씻고 잠자리에 드는데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1월 11일(토)

차량비 : 우붓→꾸따- 20000루피,     빵,쥬스-2000루피

         빵-15000루피 저녁-45000루피       택시비-8000루피

        숙박비:5만루피, 가면2개-35000루피      대나무 종-5000루피

        쥬스 및 맥주-14000루피


새벽 시장을 보러가기로 하였으나 전날의 피곤 때문인지 쉬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그냥 모른척하고 내처 자고마니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8시가 훨 지나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데 오늘은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꽃처럼 장식한 오믈렛이 아침식사였다. 그리고 과일- 파파야가 흔하게 나온다.

이곳 만디아 방갈로우는 중국처럼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 커피와 차와 함께 항상 마실 수 있게 해주어 좋다.


※만디아 방갈로우의 아침식사 : 첫째날-토스트 및 에그, 과일, 커피 및 차

                               둘째날-바나나와 파인애플이 든 재플, 과일, 커피 및 차

                               셋째날-바나나로 장식한 오믈렛, 과일 ,커피 및 차

짐을 대충 꾸리고 나와 길을 나서는 데 우리 모두 역시 학교를 지나칠 수 없어 학교에 들어가 선생님들한테 허락을 받고 둘러 보았다.

아이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자기들끼리의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교실은 거의 꾸밈이 없고 황량하다. 칠판앞에 국기와 대통령 메가와티와 부통령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책상은 우리의 초등학교처럼 두명이 하나의 책상에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아이들은 어디나 시끄럽고 어디나 함께 놀면서 즐거워한다. 쉬는 시간 외출도 자유롭게 하고....

학교에서 나와 시장에 가서 쇼핑을 하였다. 도깨비 나무 가면을 깍아서 두 개에 35000루피에 사는데 첫거래라고 돈을 가게안의 물건에다 여기 저기에 두드려댄다.

 홍샘은 튼튼한 대나무 가방을 깍아서 110000루피에 사고, 또 나와 황샘은 대나무 종을 5000루피에 샀다. 물건을 사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11시가 다 되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방값을 지불하고 짐을 완전히 꾸리니 어느새 우리를 꾸따에 데려다 줄 기사가 와 있다.

흰 옷을 입은 기사는 젊은 청년인데 좀 닳아 보였다.

선화가 조금 늦었다고 아주 신경질적이다. 사실은 우리가 약속한 12시도 되지 않았는데.....

꾸따까지는 한시간 남짓 걸렸다. 우리를 꾸따 비치에 내려놓고 숙소까지 갈려면 25000루피를 더 달란다. 얄미운 김에 내려버리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아주 친절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ADUS BEACH INN에 머물게 되었다. 숙소는 입구는 어수선했지만 깨끗하고 더운물 샤워도 할 수 있었다. 더블룸 10만루피를 제시하고는 한 푼도 깍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다녀보니 이곳이 제일 나았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타올과 화장지를 주고 오렌지 쥬스도 한잔씩 준다.

더위에 일단 쉬고 선화와 민경샘은 레게파마를 하러갔다.

쉬다가 지루해진 승분샘과 나는 바닷가로 나가보는데 가는길에 들른 24시간 편의점은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결코 싸지 않았다.

바다는 바람이 많이 불고 햇살이 따가왔다. 잠시 바라보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레게 파마를 하러간 사람들은 영 올 기미가 안 보인다.

우리끼리 쪽지를 써 놓고 저녁을 먹으러가서 빠당요리집에서 이것 저것 먹고 있으니 레게머리를 한 선화와 민경샘이 지나간다. 레게머리가 산뜻하고 예쁘고 시원해 보였다.

함께 저녁을 먹고 바다로 나가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꾸따는 해변이 길고 파도가 많이 쳐서 장엄해 보인다. 반쯤 지고 있는 노을도 멋지고 맨발로 걷는 모래의 감촉이 더할나위없이 부드럽다.

여기 저기 그물을 놓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만 보일 뿐, 책에 씌여있는 근육질의 서퍼들은 안보인다. 꾸따의 테러 때문에 다들 떠난 것일까?

그러나 노을 지는 바다를 맨발로 산책하는 기분은 캡이었다. 우린 숙소인 러기안부터 꾸따 중심지까지 해변의 모래 감촉을 느끼며 걸었다.  노래가 저절로 나오고 우리는 모두 기분이 들떠 있었다. 바다라는 것이 사람을 들뜨게 하는 것인가?

꾸따 해변에서 민수와 재호를 만나 상당히 사람들로 벅시글거리는 카페에서 맥주도 마시고 쥬스도 마셨다. 재호네가 한턱 쏘고,,,, 분위기가 좋다.

카페에서 나와 길을 걷다가 라이브 공연을 하는 카페에 들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수들이 댄스시간을 만들어주었지만 아무도 춤추려 하지는 않는다.

카페에서 나와 걷다보니 빈공터가 있었고 그 앞에 관광버스가 서있었으며 경찰들이 웅성웅성거리며 있었다. 웬일인가 물어보니 그 곳이 발리 테러가 일어났던 곳이란다.

웬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1시가 넘어버린다. 그다지 한일은 없지만 피곤하다.


1월 12일(일)

쓴돈 : 숙박비- 5만루피, 래프팅-25만루피, 저녁-85000루피, 택시비-14000루피,

       물,쥬스-3500루피


전날의 피곤 때문인지 8시가 넘어서 간신히 일어났다. 새벽 바다를 보겠다는 결심이 무색하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수영복을 입고 그위에 긴 남방과 반바지를 걸치고 나가니 민수,재호가 미니버스와 함께 와 있었다.  버스는 우리가 머물렀던 우붓으로 향했다.

논과 야자나무들이 병풍처럼 스쳐갔다. 래프팅 시작점에서 썬크림을 잔뜩 바르고 귀중품을 두꺼운 비닐가방에 넣고 고무보트를 탔다. 폭포를 시작으로 내려가니 박쥐 동굴이 보이고 작은 폭포들이 나타난다. 래프팅은 생각보다 안전하고 격렬하지 않았다. 아윤강의 수려한 모습을 보며 하는 보트놀이 같았다. 래프팅이 끝난 후 강에서 걸어 올라오는 데 계단을 한참 올라오다 보니 어느 지점에선가 간이 에레베이터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60KG이나 되는 짐꾼들이 지는 보트 등 짐을 나르는 용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엔 우리가 타고 짐꾼들은 그 무거운 짐을 이고 걸어 올라간다. 순간 머쓱해졌다. 인간에 대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마지막 지점에서 샤워를 하는 데 커다란 타월도 준다.  또 인도네시아식 뷔페를 점심으로 주었다. 뷔페에는 각종 샤떼와 야채 샐러드, 과일  그리고 어설프지만 김치도 있었다.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도 여기 저기 보인다.

 돌아 오는 길도 평화로웠다. 수영복에 사롱만 걸친 우리도 자유롭고...

숙소로 돌아오니 기다리다 지친 황샘과 홍샘이 반갑게 맞이한다.

이왕입은 수영복을 벗기 아까워 숙소에 있는 수영장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작다고 얕본 수영장은 2미터 깊이였다. 방심한 상태로 배영을 하는데 중간 쯤에 가서 멈추다가 바닥에 발이 안 닿는 바람에 놀라서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선화가 가상자리로 밀어주는 바람에 간신히 살아났다. 몇 년전에 기초만 배운 수영실력이 무색하였다. 물을 조금 먹었는지 머리가 아프다. 이 사건이 우리 여행의 비하인드 스토리 1위가 되어버렸다.

잠시 진정한 후 샤워을 하고나서 택시를 타고 누사두아 갤러리아로 갔다. 누사두아는 호화리조트의 스페셜 존이었다. 입구를 들어가니 정갈하고 정돈된 조경이 눈에 들어온다.

갤러리아 호텔에는 면세점과 고급식당 많이 있었고 우리는 물건을 사지는 않고 그동안 우리가 산 물건들을 그 곳의 물건값과  비교하고는 정신적 만족감을 얻기 바빴다.  예를 들면 홍샘의 110000루피짜리 대나무 가방이 이곳 갤러리아에선 물건의 질이 더 떨어진데도 300000루피나 하였다.

쇼핑센터를 가로질러 비치로 나가니 안온한 바다가 보인다. 이 곳 모래는 다소 거칠지만 깨끗하다. 바다색은 밝은 옥색이고 거친 꾸따와는 달리 부드럽고 우아한 풍광을 지니고 있었다. 갤러리아 비치를 걷다 옆으로 가니 멜리아 발리 비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비치는 허니문을 위한 비치 방갈로 디너가 마련되어있었고 밤의 조명과 더불어 환상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곳으로 신혼여행 온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의 환상과 화려함만을 보고 즐기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우리가 생각한 낭만적인 바다와 호텔이 바로 이곳이었다.

벌써 깜깜해진 누사두아를 택시를 타고 빠져나온 우리는 사누르 근처의 KOKI라는 레스토랑으로 가서 마지막 만찬을 즐기기 위해 민수와 재호를 만났다.  이 레스토랑은 우리나라 여성이 운영하는 퓨전음식점인데 택시기사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식당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부티나게 T-BONE스테이크 등의 요리를 시켜먹으면서 떠들면서 즐겁게 만찬을 즐겼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우리들 다섯명이 다시 평가회를 가졌다. 발리에서 함께한 여행이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오늘도 여러 가지를 하며 논 하루였다.


1월 13일(월)

쓴돈 : 택시비-20000루피  점심-12000루피, 저녁-17000루피

      롬복,길리 교통비-210000루피(FAST FERRY) 숙박비-5만루피

      목걸이,귀걸이,팔찌-18000루피, 아이스크림-2000루피, 빵,쥬스-17000루피


오늘이 민경, 홍샘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다.

부지런히 짐을 꾸려 우리 방에 넣고 쇼핑과 환저, 롬복가는 것을 계약하러 택시를 타고 꾸따 중심가로 나갔다. 상점을 기웃거리다 귀걸이도 사고 목걸이도 샀는데...... 한참을 거닐다보니 9090루피=1불을 게시해논 환전소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니 인상이 안 좋은 남자가 나와서 처음엔 920000루피를 세어주면서 자기는 거스름 돈이 없다면서 거스름돈을 달란다.  황샘을 부르는 순간 돈이 그 남자의 손으로 넘어가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다시 세어보려하니 못 세어보게 하였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화를 낸다. 다시 세어본 결과 30만 루피아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매직쇼를 본 듯한 느낌이다. 액수가 맞지 않는다고 항의를 하니 이번엔 82만 루피아만 주면서 수수료란다. 안 바꾸겠다고 100불을 내놓으라니까 마구 꾸겨서 준다. 꾸따에 대한 인상이 팍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 가게이도 가보니 이번엔 여러명의 남자들이 둘러싸고 10000루피짜리로 번잡하게 돈을 세더니 역시 똑같은 수법으로 20만루피아를 가로챘다. 우리 다섯명이 정신차려 보았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기가막힌 매직쇼였다. 이들은 우리에게 통성명을 요구하고 반지를 사라고 하는 등 정신을 쏙 빼는 수법을 쓴다.  그들의 수선에도 난 정신을 똑바로 차려 보았는데도 돈을 빼가는 순간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다시 돈을 셌고 역시 20만루피가 모자랐다. 따지니 자기네는 돈이 없으니 못 바꾸어주겠단다.

이후에도 한두군데를 더 다녀보아도 마찬가지 수법이었다.  정말 주의를 요구한다.

높은 환율을 포기한 우리는 마타하리 몰에가서 8860루피=1불로 쌈박하게 바꾸고 말았다.

맥도널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먹고 다시 누사두아 하얏트리조트로 구경을 갔다.

하얏트는 목가적인 정원꾸밈이었다. 연못에는 오리가 놀고 처음 꾸며진 리조트의 특권인지 비치도 엄청 길고 크다. 그렇지만 좋겠다라는 생각뿐 이제는 내가 묵을 숙소가 아닌 남의 집을 구경하는 일이 심드렁하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숙소앞 카페에서 황샘이 과일쥬스를 쏘았다.

5시 50분쯤. 짐을 완전히 챙긴 민경,홍샘, 선화,민수,재호 등을 택시에 태워 공항으로 보낸 우리는 바다로 나갔다. 꾸따 해변엔 해가지려하고 있었고 넓고 큰 바다는 파도가 멋들어지게 치고 있었다. 그 속에서 현지인들이 그물을 놓아 고기를 잡고 아이들 몇 명은 파도를 타고 놀고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의 외국인들은 맨발로 바닷가를 조깅하고 있었고....

뛰어들고 싶은 바다는 아니지만 그 장엄함을 즐기기에는 좋다. 한참을 바다를 즐기다가 돌아오는 길에 빠당요리로 저녁을 먹었지만 조금 바가지를 쓴 거 같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환전도 했다. 주변 상가를 어슬렁거리다 돌아온 숙소에서 마지막으로 수영을 하였다. 깊은 곳에는 못 들어가고 낮은 곳에서 왔다 갔다. 하려니 좀 우습다.

샤워를 하고 책을 읽으려니 졸립다. 일기고 뭐고 그냥 포기하고 잠을 청하였다.

내일은 5시엔 일어나야 짐을 꾸릴 수 있다.



1월 14일(화)

쓴돈 : 아침 커피-8000루피, 저녁- 17500루피 숙박비-15000루피, 물,개미약-20000루피


긴장을 해서인지 다섯시에 눈을 떳다. 짐을 꾸리니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앞에 나가 20분쯤 지나서야 버스가 왔다. 중간에 서양커플 두명을 태우고 2시간쯤가니 빠당바이 항구다.

항구의 한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ferry 티겟을 받는데 75000루피였다. 우리가 낸 210000루피가 무색하였다. 페리는 10시 30분 출발이었다. 작은 배인데 빠당바이에서 롬복까지 1시간 걸린다. 배는 작고 화학냄새가 좀 나지만 물도주고 사탕도 준다. 배안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정직한 듯하였다. 

황샘은 배멀미를 심하게 해서 얼굴이 핼쓱해졌다.

배에서 내리니 wisama 여행사 직원이 나와 우리를 차에 태운다. 차에 태우더니 중요한 이야기라면서 돌아갈 차편을 사라고 너무도 너무도 많이 종용하였다. 처음엔 거절했던 우리도 그가 길리에 가면 여행사가 모두 문을 닫았고 값도 엄청 비싸다고 하도 열심히 이야기 하는 바람에 넘어가 버렸다. 슬로우보트로 11만루피에 덴파사르까지 계약하고 돈을 주고 말았다.

롬복의 lembar에서 2시간쯤 버스가 달리니 Bangsal에 도착하였다. 여행사 직원이라고 하는 사람은 30분 기다렸다가 배를 타라고 하면서 가버린다. ---그는 한국 수원과 창원에서 2년간 근무했었다고 했지만 한국말을 전혀 못하였다. 수상.--

17일에 만나자고 하고...

식당에선 남자 아이들이 둘러싸 우리를 향해 협잡을 꾸몄다. 멀미약도 두알에 20000루피에 팔고 파인애플 쥬스도 가짜였고 배를 타는데도 배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더 내야 한단다. 그들의 말을 묵살하고 작은 배를 탔다.

배는 양쪽에 균형을 잡는 막대기가 달려있는 나무배였다.

작은 배를 타니 기분은 좋다. 풍광도 수려하고 물도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맑다.

멀리서 돌고래가 치솟았다가 들어가는 모습도 보이고... 그래도 황샘은 배멀미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배는 45분쯤 지나니 길리 뜨라왕안에 도착하였다.  배를 대는 선착장도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맑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배에서 내리니 우리가 찾던 BEACH WIND방갈로우가 바로 앞이다. 욕실 딸린 트윈룸을 30000루피에 계약, 아침도 준단다.

방에 짐을 풀고 무조건 쉬었다.

저녁을 나시고랭으로 먹고 바닷가 선착장에 가서 스프링롤 하나를 사먹었다.

그리고 나서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바닷물은 아주 짰다.

이 동네는(섬은) 마차와 자전거가 중요 교통 수단이다.

둘레가 9킬로미터, 인구 750만명, 어린 왕자의 별에 온 느낌이다.

8시 30분쯤,졸린 눈을 비비다 잠이 들었다.


※아까 버스에서 덴파사르까지 가는 것을 11만루피에 계약했는데 섬에 들어와 보니 8만 5천루피이다. 기가막힌 노릇이었다. 갑자기 몽땅 사기 당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배를 탄 독일 여자가 선뜻 표를 산 것이 화근이었다.


1월 15일 (수)

쓴돈 : 숙박비-30000루피, 바나나튀김-2000루피, 마차-20000루피(2인)

       점심-29000루피, 간식-스프링롤, 팬케잌-5000루피, 저녁-29000루피


5시 20분쯤 그냥 눈을 비비고 나와 일출을 보고-일출은 넘 눈부시게 희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바나나 튀김 한 개씩을 사먹고 다시 바닷가를 거닐었다. 한가롭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바닷가. 늘 이곳에 살고있는 원주민들도 바다에 홀린 듯 앉아 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고 느지막히 아침을 먹고 일기를 쓰고 또 잠을 자고 여행을 시작한 이후 이토록 게으름과 한가로움을 만끽해 본적은 없었던 거 같다. 늘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했지....

동네는 전형적인 농촌과 어촌 마을이었다.

밀린 일기를 쓰고 책을 읽다가 잠을 자다가 하는데도 시간은 간다. 

대충 일어나 느적거리며 보로보로도레스토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스파케티와 나시고랭을 뜨겁게 요리한 것이 맛있다. 생과일 쥬스도 저렴한 편이고..

점심도 천천히 먹고 대형화면으로 애니메이션도 보고 한가함이 가득하다. 

다시 길을 나서니 뜨거운 햇살이 위협하고 있었다. 식당 근처의 시장에서 롬복스타일의 가면을 하나샀다.

그리고 Glass bottom boat tour를 1인당 30000루피에 예약을 하고... 투어는 내일 10시 30분에 출발하여 오후 3시에 끝날 예정이다. 우리가 스노쿨링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햇살이 눈부신 대낯의 바다는 더욱 깨끗하였다. 그리고 빨래도 잘 말랐다. 어느 정도 해가 진 저녁 수영복을 속에 입고 사롱을 걸치고 숙소를 나섰다. 마차로 섬 한바퀴를 도는 데 마치 무릉도원에서 신선놀음을 하는 기분이다. 시골길도 가고 산호바닥을 달리기도하고 한쪽 바다에선 해가 희디 희게 지려하고 있다. 섬 주변 이곳 저곳에선 방갈로가 앙증맞게 자리잡고 있었고 모두들 한껏 한가로운 모습으로 나른하고도 평화로운 섬생활을 즐기고 있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 마주치는 모두에게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건네 받았다. 마차로 섬을 한바퀴 도니 한시간 남짓 걸렸다.

선착장으로 가니 어제의 스프링롤 청년이 나와서 이번엔 팬케잌까지 굽고 있었다. 팬케잌과 스프링롤을 사서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먹었다. 근처의 아이들이 나를 보고 눈이 작다고 놀린다. 팬케잌을 먹고 다시 보로보루드 레스토랑으로 가니 영화를 틀어주고 있었다. 새우 나시고랭과 나시 깜부르, 그리고 맥주로 정말 배부르게 먹고 영화 “반지의 제왕”도 보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본 하늘 한구석엔 별과 달이 하나씩 유난히 반짝거린다.  오늘은 이 좋은 바다에 물한번 담그지 못하고 하루가 가고 있다.



1월 16일(목)

쓴돈: 진주목걸이-50000루피, 점심-42000루피, 저녁 9000루피, 스노쿨링투어-37500루피

     오리발 대여-10000루피, 숙박비-30000루피


눈을 떠보니 6시가 넘어버렸다. 어제 하루종일 빈둥거렸는데도 피곤함이 온몸을 누르고 있다. 그래도 해뜨기전에 동네 한바퀴를 돌아야한다는 일념으로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산책을 나갔다. 바닷가는 조용하고 일찍 잠에서 깬 꼬마가 닭한마리를 안고 걷고 있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니 포즈를 취해준다. 찍은 다음 보여주니 좋아서 깔깔거리며 웃고...

이 길리섬의 아름다움은 늘상 사는 사람의 마음도 쉬지않고 빼앗는 것일까?

현지인들 중에도 바닷가에 주저 앉아 망연자실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뜨인다. 그들의 모습이 정지된 한폭의 그림같다.

또 부지런한 몇몇은 집앞을 비질하기 바쁘다. 옛날 우리네처럼,,, 누가 인도네시아인들을 게으르다고 했는가?

햇살이 뜨거워짐을 느낀 우리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10시 조금 지나자 어제 예약했던 스노콜링배를 타러갔다. 갔더니 어제는 5명이 모여졌다더니(다섯명이 최소 인원이란다.) 4명 뿐이라고 한명분의 가격을 4명이 나누어서 내란다. 출발 시간은 한시간이나 늦어졌다. 그러나 어차피 뚜렷하게 할 일이 없는 이 섬에서 초조하지는 않다. 태양 때문에 더욱 희게 빛나는 바다를 감상하면서 기다리는 맛도 제법 좋다.

11시 30분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는 보트는 길리뜨라왕안의 해안을 떠났다. 유리밑으로 바다속이 들여다 보인다. 물소리를 찰싹거리면서 가는 배안에서 느긋하고 거만하게 몸을 뒤로 젖혀 바라다보는 풍광이 낙원이 따로없다.

길리 메노 근처의 첫 번째 스노쿨링 장소에서 수영을 못하는 우리는 겁에 질려있었고 결국 구명조끼를 입고 안내인의 손을 꼭 잡은 채 바다에 뛰어들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린 것도 잠시. 바다속의 환상적인 모습에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 되었다. 대형 수족관에서나 볼 것 같은 형형색색의 물고기. 보라색 자주색의 너플거리는 산호초. 거기에다가 어린애 몸집만한 거북이가 유유히 떠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의 혼이 나간 상태로 바다밑을 훔쳐보다 다시 떠올라 배를 타는 데 쉽게 올라타지지가 않는다.

--숨을 쉴 수 있는 안경과 핀의 효과가 탁월하다.--

바닷속 세계의 경험은 거의 전율 그 자체였다. 항상 경이롭게 시청하던 TV 다큐멘터리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배는 다른 스노쿨링 장소로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황샘은 이미 기력이 쇠잔해져서 그만하고 싶어 했지만 배에 타고 있는 것이 더욱 울렁거려 바다에 뛰어 들고 말았다.  이번 바다는 먼저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더 큰 거북이도 있고 선명한 보랏빛의 커다란 불가사리도 있고 산호초들도 더욱 화려하고 다채롭다. 광어과인 노란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의 물고기도 많고 가시가 투명하게 들어나보이는 잘디 잔 물고기도 떼로 다니기도 한다. 거의 실신할 것 같은 경이로움에 어찌 내가 살아 생전에 이런 경험을 다 하는가 싶은 우월감마저 생겼다.  30분쯤 유영을 하다 다시 배위에 타니 나의 손을 잡아 주었던 눈이 반짝 빛나는 인도네시아 남자는 저녁에 파티장에 함께 놀러가자고 작업을 한다.

난 맞추어 주느라고 난 가고 싶지만 친구가 아파서 안된다고 했고... 황샘은 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누워버리고 말았다.

함께 스노쿨링을 하던 귀여운 서양여자가 약한알을 준다. 그걸 먹고 다시 누워버리는 황샘..

배는 길리아일 해변 앞에서 마지막 스노쿨링 포스트라고 하면서 멈추었다.

그러나 마지막 포스트는 그 전의 두 곳에 비해 별루였다. 물의 온도는 따뜻했다, 차가웠다. 하면서 오락가락한다.  스노쿨링이 끝나고 길리에어의 한 해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너무나 조용하고 너무나 흰 바다 때문에 현실세계같지 않은 곳에 초가지붕을 두른 식당 하나가 물질감없이 놓여있었다.  음식은 턱없이 비싸고 맛이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행상인들이 우리에게 물건을 늘어놓고 사라고 조른다. 천연진주목걸이 라는 것을 5만루피 주고 샀다.  밥을 먹고 난 식당과 해변은 눈부시게 흰 태양과 함께 정지된 고적감이 감돌면서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고 있었다.

뜨라왕안으로 오는 배안은 환상을 본 충족감과 오늘은 더 이상의 고된 일과가 없다는 만족감까지 겹쳐 주변이 더욱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해안에 도착한 배에서 내리기 직전 잠시 마음의 혼란이 있었다.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바다세계를 볼 수 있게 손을 잡아 주고 도와준 인니 청년들에게 뭔가 고마움의 사례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남감한 우리는 고맙다는 말만 잔뜩하고 이별을 하고 말았다. 그 동안의 친절한 표정은 어디가고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마치 공짜로 뭔가를 훔친 거 같은 찝찝한 마음이다.

배에서 내리니 종아리와 허벅지 뒷면이 장난이 아니게 시뻘겋다. 샤워를 하고나니 본격적인 화상의 고통이 함께 했다. 쉬다가 저녁으로 먹을 바나나를 사러 선착장에 나가 예의 스프링롤을  또하나 사먹었다. 매운 고추가 입안을 개운하게 한다.

찬 생수통으로 벌건 다리를 맛사지해도 고통은 줄지 않았다.

책을 읽다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1월 17일(금)

쓴돈 : 점심-38000루피, 물-3000루피, 숙박비-30000루피(2인)

       빵-15000루피, 스노쿨링 마스크 렌트-10000루피, 맥주,쥬스-14000루피


5시에 일어나기를 원했건만 눈을 떠보니 6시 30분이 다 되어 버렸다. 이미 해는 희고 강렬하게 떠있었다.

화상입은 다리는 장난이 아닌 통증을 동반하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니 신경을 자극했는지 악~ 소리가 절로 난다. 그래도 조금 걸어보니 약간은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20분 정도 해변을 산책하다 태양이 무서워 돌아오고 말았다.

아침을 먹고 진통제 한알을 먹다.

이 한가한 섬에서 노년의 감상을 적은 박완서의 “두부”를 다 읽었다.

책을 읽고 바다소리를 들으며 한발자국 나가면 무차별하게 퍼부어지는 희디흰 태양 줄기를 피해 그늘에 앉아 있는 한가함의 매력, 이것이 길리 뜨라왕안이다.

진통제를 먹어도 화상의 통증은 여전하였다.

하루종일 뒹글거리다 2시가 넘어서 “보로보로드”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깐고랭(생선튀김), 나시고랭아얌을 뜨겁게 조리해주니 맛있다. 뜨거운 햇살 때문에 4시까지 식당에서 죽치며 tv채널을 돌리고 있었으나 살갗에 입은 화상 때문에 앉아있는 것이 고통스러워 일어나고 말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다시 뒹글거리다 해질 무렵부터 부랴 부랴 수영복을 입고 물안경을 하나씩 빌려 바닷가로 나갔다.  물속에서 숨쉬기가 쉬우니 수영하는 것이 쉬웠으나 파도 때문에 몸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한다. 저물어가는 바다는 파스텔톤으로 너무나 신비롭고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저멀리 보이는 롬복섬은 푸르른 색으로 덮여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었고 저 건너 서쪽에선 아름다운 노을이 세상을 가득채우고 있었다. 바다는 돌아온 보트를 묶는 사람들 한 두명만 보일 뿐 세상의 흐름이 정지된 낙원같았다.

보름달이 화려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어디선가 두둥실 떠올랐다.

순간 보름달의 은은한 빛이 바다위에 뿌려지고 옆에 있던 청년이 그도 달이 매혹적인지 우리보고 달을 보라고 한다.

사람의 감정은 같은 것일까?

수영을 멈추고 사롱을 뒤집어 쓴 채 산호를 찾아 바다를 헤메이다 그도 멈추고 신비로운 바다에 안기기 위해 해변을 그냥 걸었다.

내일 떠나기엔 넘 아쉽고 넘 아름다운 섬이다. 신혼여행지로 강추해야겠다고 황샘과 너스레를 떨었다.

이 한적함과 아름다움과 게으를 수 있는 섬을 떠나는 마음이 애절해진다.

샤워후 빵을 사러 돌아다니다 저녁나절 우리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러 물속에 들어왔다가 추위에 부르르 떨던 청년이 자꾸만 자기네 식당에서 뭘 먹고 가라고 하기에 그의 식당에 들렀다. 맥주를 마시며 인니어도 배우고 대충 수다도 떨어보았다.

그는 한국에 돈 벌러 가고 싶다고 말하기도하고 돈이 없어 자바섬에 못 가보았다고도 하였다. 돈! 돈이 문제였다. 한국여자를 사귀고 싶다고도 하였다. 한국여자가 나이스해 보인다고도 했는데 그는 정말 한국여자가 좋은걸까? 한국여자가 부자일 거 같아서 좋은 것일까? 들고 다니던 목걸이 볼펜을 그와 함께있던 사사크청년-곱슬머리를 부하게 기른-까지 나누어 주었다. 볼펜을 받은 그들은 마구 좋아한다. 그러면서 파티에 같이 가자고 하고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주소를 적어주기도 하고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고도 한다.

길리에서의 마지막 밤은 이렇게 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달이 요염한 자태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햇볕에 탄 살이 아프다. 정말 좋은 것을 보는데는 댓가가 필요한가보다.

※ 카페에서 이야기할 때 이 곳 사람들은 황샘을 25살이라고 보았다. 기분이 캡인 황샘.

  난 그냥 대충 말해버렸다. 여행다니면서 이렇게 사기쳐도 되는 걸까?


1월 18일(토)

쓴돈 : 음료수 및 기타-17000루피   택시비-27000루피, 솔로행 버스 티켓-140000루피


오늘은 24시간이 훨 넘는 여행! 대장정을 떠나는 날이다. 새벽 3시경부터 이슬람 사원의 기도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시끄럽다. 일어나 나가보니 주변은 어둡고 하늘의 달은 간 곳 없고 별들이 촘촘하다.  다시 들어와 침대에 누워있다보니 주변이 어슴프레 밝아온다.   6시쯤 혼자 산책을 나섰다. 바다 저쪽 롬복산 모퉁이에서 발그레하니 해가 떠오르려하고 있었다. 부지런한 아이들과 아낙들이 물빠진 해변 이곳 저곳에서 작은 조개 알갱이를 캐고 있다. 붉은 기운으로 신고를 한 해는 금방 완전한 둥근 형태로 나타나 눈을 시리게 하였다.  해변을 산책하며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한 다음 숙소로 돌아오니 친절하게도 숙소주인이 우리가 떠날 것을 알고 아침식사를 일찍 챙겨준다.

숙박비를 계산하며 “이곳이 마음에 든다. 다른 한국인들에게 추천해 주겠다.” 라고 하니 좋아하며 명함을 주었다. 이 곳의 부지런한 할머니, 착한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선착장으로 가니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나와 있었다. 우리의 wisata티켓을 보여주고 작은 배를 20여명의 사람들이 기우뚱거리면서 탔다. 30분 정도 가니 Bungsal롬복항이다.

항구에서 200미터 떨어진 버스터미널에서 우리는 예의 그 사기꾼이자 뻔뻔함의 극치인 Mani를 만났다. 우리는 끈질긴 그에게 11만루피에 티켓을 샀는데 길리에선 8만 5천루피에 팔리고 있었다. 그에게 네가 나를 속였다라는 말만하고 그만두기로 하였다. 우리 영수증에는 금액을 써놓지 않았기 땜시.   그대신 그 주변의 인니인들에겐 절대로 버스안에서 티켓을 사지 말라는 경고를 인터넷에 쓰겠다고 했다. 그들은 원래 그런 거라고 웃는다.

9시 30분에 출발한 버스(작은 버스에 9명이나 탔다.) 마따람을 거쳐 11시 30분에 Lembar항에 도착하였다. 12시에 출발한다는 페리표를 여행사 직원에게 재촉했으나 안 주더니 12시에 편법으로 우리를 들여보내준다. 수많은 음식물 행상이 배에 같이 들어오고 현지인들이 상당수 탄 배에서 우리는 여행 중 처음으로 관광업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 인니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배는 정말 slow slow하게 간다. 무더웠던 배안은 배가 움직이자 시원해졌고...

또 한명의 사삭아저씨와 되도 안되는 말을 하며 주소를 교환하였다.


※이 더운 날씨에 서양 배낭족들은 태양이 온통 내리쬐는 갑판으로 죄다 올라간다. 그들의 태양으로부터의 자유가 신기할 뿐이다.


배는 어지간히 후덥지근하였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태양에 탄 엉덩이는 아프다.

정말로 천천히 천천히 가는 배는 5시가 다 되어서야 빠당바이에 도착하였다.

 fast ferry는 한시간이면 될 것을 다섯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빠당바이에 도착하니 wisata사람들이 종이에 wisata라고 써가지고 나와있다. 연계체계가 잘 되어 있는 듯 싶다. 버스엔 우리 둘과 독일인 커플-이들에게선 여행의 여유가 있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다.-, 그리고 뒤늦게 협상에 성공한 -아마 이들은 빠당바이에서 꾸따까지 16000루피에 협상을 한 듯하다.-서양인 3명하고 빽빽하게 앉아가게 되었는데 내옆의 서양할배는 우리에게 자꾸만 물을 마시라고 권하고 머리위에 악기를 얹은 채 참으면서 잘도간다. 

길리에 있는 4일동안 비를 안 만났는데 덴파사르 가는 길에 비가 한바탕 쏟아졌다.

길옆의 벼들과 야자수가 싱그럽다.

덴파사르에 가까이 오자 큰 건물들이 눈에 띄면서 문명세계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6시 30분 우리 둘은 덴파사르에 남겨졌다. 마침 와 있는 택시를 타고 우봉 버스터미널로가니 7시다. 아슬 아슬하게 7시 20분발 솔로가는 차를 얻어탈 수 있었다.

버스는 에어컨이 잘 나오고 화장실과 담요와 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의 좌석이 찬 버스는 출발하자 물과 사탕과 빵을 나누어 준다.

의자는 침대처럼 뒤로 완전히 젖힐 수도 있었다.

버스는 발리의 해안도로를 달린다.

길고도 멋진 해안에 파도가 넘실대는 모습을 보면서 낮에 이 길을 달려도 멋질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졸다가 깨다가하니 11시쯤 버스는 항구 길리마눅에 도착하였다.

항구에서 수십대의 차량을 실은 배는 순식간에 빠른 속도로 항구를 벗어난다.

배의 3층에서 내려다 본 바다가 현기증이 나게 까마득하였다.

한시간 쯤 바다를 건넌 배는 다시 차들을 쏟아냈다.

하얀 보름달을 버스에 누워 보다가 잠이 들었다.

1월 19일(일)

쓴돈: 베짝-15000루피, 숙박비-35000루피(2인), 입장료-5000루피, 귤-5000루피, 빵-6000루피

     저녁-23000루피(요리 3개, 코코넛음료 1 아이스크림 2)


새벽 3시쯤 버스안의 불이 환하게 켜지더니 식사쿠폰을 하나씩 주면서 밥을 먹으란다.

아마 버스비에는 식사비가 포함되었나보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밥과 야채볶음과 뗀베-대두를 발효시킨 것-,닭튀김과 차가 있었다.

밥을 먹고 다시 달린 버스는 6시 수라바야에 도착하였다. 수라바야에서 다른 버스를 갈아탄 우리는 7시쯤 다시 수라바야를 출발하였다.

버스는 3시간 동안 쉬지않고 달리더니 10시쯤 식당에 내려 밥을 먹게 해주었다. 식사와 차가 나오는 데 양이 무지 적다. 이 곳에서 화장실과 양치질도 해결. 다시 달린 버스는 길가의 힌두 학생들의 축제와 가축시장 등을 보여주더니 12시쯤 솔로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자바시간 11시-

날씨는 무지 덥고 햇살은 강하다. 어리둥절해 있는 우리에게 한 베짝기사가 다가오더니 우리가 찾는 이스타나 그리야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안다고 한다.

그에게-베짝기사 답지않게 영어를 잘하고, 기분이 좋은지 이곳 저곳 안내도 잘한다.- 15000루피라는 거금을 주고 베짝을 타게 되었다. 초행이므로 바가지를 쓴 듯싶다.

숙소의 방들은 어둡지만 대체로 깔끔한 듯하다.

근질거리고 더러워진 몸을 씻고 밀린 빨래를 해서 뒤뜰에 널어넣고 쉴 생각도 없이 거리로 나섰다.

솔로가 지금까지 평화스럽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싸여있는 것은 이 거리에 두 개의 왕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쟈바문화의 진수를 드러낸 정교하고 치밀한 두 개의 왕궁이 세워진 것은 18세기의 일로 그 이전에 쟈바를 지배하고 있던 마따람 왕조가 까르또스로를 왕도(王都)로 삼았지만, 18세기 후반의 전란 뒤 까르또스로는 황폐해지고 부오노 3세 때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 결국 왕조가 두 개로 나누어져서 족쟈카르타에도 왕가가 생겨 스루딴(족자의 왕의 칭호)이 탄생했다. 솔로 왕조는 그 후 다시 망꾸느가란 왕가가 새롭게 탄생해서 같은 땅에 두 개의 왕조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춤공연이 있다는 왕궁 까수난난-수라까르따라고도 불린다.-로 베짝을 타고 갔다.

거리는 역시 덥고 더위에 먹혔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박물관을 관람하고 들어갈 수 있는 왕궁은 희고 높은 벽에 둘어싸였고 박물관에는 가믈란 악기, 와양인형,도검,왕실의 가구나 마차 등이 전시되어있었다.

이 곳은 학생들의 견학이 많은 것 같으나 진열이 어둡고 성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진지하게 설명들으며 관람하고 있었다.

박물관 북쪽 입구로해서 궁궐로 들어가니 시원하게 뻗은 앞마당의 나무들이 있고 한쪽에 두뚝 솟아있는 등대같은 팔각형의 탑이 보인다.

이 탑의 꼭대기 방에는 솔로왕이 일년에 한번 여신 라뚜가두르를 만났다는 전설이 있다.

정면에 장엄하고 깨끗하게 단장한 거실이 있었으나 밖에서 바라볼 수 있을 뿐 들어가지 못하게 관리인이 따라다닌다. 책에는 가이드가 포함된 입장료라고 하였으나 가이드는 우리에겐 없었다.

왕궁에서 나오니 여전히 땡볕이다. 간신히 물어 물어 춤 연습실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가물란 음악이 듣기 좋고 젊은 여자들의 진지한 춤연습과 카리스마가 있는 춤선생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외부인을 대하는 태도가 꽤 도도하다. 전통춤을 배우는 자부심이 큰 거 같다.

밤차를 달린 탓인가?   정적인 이들의 춤을 보면서 피곤이 몰려온다. 춤이 끝나자 시장거리를 걸어 나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귤-미적지근한 맛이다. 과일이 맛있다는 이 나라에서 아직 맛있는 과일을 맛보지 못했으니 불행한 것인가? 우기에 온 댓가인거 같다.-을 사서 먹으면서 복잡한 길을 걷는다. 쌀 푸딩도 맛보고....

바틱 크리스로 갔다. 바틱 크리스는 정갈한 건물로 시원하고 깨끗했다. 정신이 좀 깨어나는 듯하다.    식탁보와 손수건 몇장을 사서 나와 숙소 길거너편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식당- 이곳은 정장 차림의 웨이터와 에어컨이 있었다.-에서 저렴한 가격에 즐거워하며 이것 저것 시켜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침식사용 빵을 사고 숙소에 도착하니 6시가 넘었다.

방안은 환기가 안된 탓인가? 퀴퀴한 냄새가 난다. 선풍기도 부실하고....

숙소에서 내일의 수꾸사원 투어를 신청하려 했으나 비싸고 공공버스를 이용하고 걸어다닌다는 말에 취소해 버렸다.

해리라는 친구가 가이드해줄 예정이었는데 그한테 습작 그림을 선물받은 터라 약간 미안했지만 잘 한 것 같다.

방안은 이 우기에 무지 건조하다. 밤새 황샘의 기침소리가 들렸으나 아는 척하기에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29시간의 대장정이 엄청 피곤을 가져왔나보다.


길리뜨라왕안(배로 30분)→롬복(버스로 두시간)→롬복Lamber(배로 5시간)→발리 빠당바이(버스로 1시간 30분)→덴파사르(택시로 20분)→덴파사르 우봉터미널(버스로 3시간)→

발리 길리마눅(배로 1시간)→자뱌 바누왕이(버스로 5시간)→자뱌 수라바야(버스로 5시간)→솔로.


1월 20일(월)

쓴돈 : 차비-베짝왕복;6000루피, 버스(솔로→카랑판단)왕복-5000루피,

      (카랑판단→칸디수꾸)왕복-4000루피, 베짝 9000루피, 오토바이 55000루피(이인)

     점심-23000루피, 저녁 15000루피, 팝미-6000루피


건조한 가운데에도 정신없이 자긴 잤는가 보다. 6시 넘어서야 일어나 씻고 어제산 빵과 숙소에 부탁한 커피로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거리로 나섰다. 이리 저리 길을 묻다 결국은 베짝을 타고 Tironadi 버스터미널에 갔다. 그 곳에서 곧장 Tawangmangu행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가서 Karangpandan 버스 터미널에서 Candi sukuh 까지 갔다. 버스는 첫 번째 버스가 컸으나 무지 낡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거리의 악사들이 올라와 노래를 부르고 간다. 차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올라 올 때마다 동전을 하나씩 던져준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인정이 엿보였다.

미니버스는 사람을 차곡차곡 쟁여서 떠났다. 처음 카랑판단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을 가득 채운 버스가 우리를 향해 타라고 난리였었다. 탈 엄두가 안난 우리가 사양하고 다음차를 기다렸으나 다음차도 마찬가지다. 차는 고갯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더니 기후가 서늘해지기 시작하였다.

15분 쯤 갔을 때 수꾸 짠디라며 내리란다. 어리벙벙하여 내렸으나 서늘한 기후가 우리를 반긴다. 오토바이꾼들이 오토바이타고 수꾸까지 가자고 교섭해온다.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던 우리는 두 대에 편도 6000루피에 교섭하고 탔다. 가는 길이 너무도 아름답다. 아스라하게 푸르름에 덮힌 마을이 보인다. 기분좋은 속도로 가던 오토바이는 수꾸사원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한적한 수꾸는 한쌍의 연인과 몇 몇 동네 아이들 밖에 없다.

앞에 피라미드처럼 생긴 돌 건축물이 눈에 띈다.

솔로의 동쪽으로 36Km 떨어진 라우 산 기슭에 지은 수꾸 사원은 다른 쟈바 건축양식과는 거리가 있는데 남미에 번성했던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와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15세기 마자빠힛 왕조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이 신비한 수꾸사원은 보통의 자바 건축 양식과는 다른 것이란다.

세 마리의 거대한 거북이의 석상이 있고 안뜰에는 힌두교 세계의 와양이야기나 수 많은 동물을 소재로한 부조나 석상이 비좁게 들어서 있었다.

또 안 뜰의  링감이 있는데 이 상징위에 여성이 사롱을 입고 누워있으면 부정이 있었던 경우 사롱이 터진다는 전설이 있단다. 사롱은 아니지만 반바지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 반바지는 찢어지지 않았다. 하하하.

사원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니 아득하게 마을이 보이고 풍경이 넘 좋다. 덥지도 않고... 사원에서 입구로 온 우리는 결국 오토바이를 55000루피에 두 대 대절해서 쩨토까지 가기로 하였다. 쩨토 가는길은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광한한 차밭과 구비 구비 올라가는 산길.

결국 오토바이 기사의 허리를 움켜잡으면서 가고 말았다.

멀리 모자를 눌러쓴 아낙들이 차잎을 따고 있다. 날씨는 서늘하여 더할나위 없이 상쾌하고... 25분간 달린 오토바이는 쩨토 입구에서 우리를 내려 주었는데 소풍온 학생들이 무더기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사진을 찍으니 까르르 웃으면서 넘 좋아한다. 머리까지 보자기로 뒤집어 쓴 무슬림 학생들이 엄청 발랄하다. 까르륵 까르륵....

역시 쩨토 사원도 신비한 분위기가 압도한다. 그 신비함의 원인은 이 곳의 자연 신앙이 힌두교나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거대한 거북이 상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박쥐,메기, 가오리,쥐 등의 동상이 여기 저기 매치되어 있었다. 역시 마야 문명 풍의 사원 본전앞에는 거대한 남근이 모셔져 있었다는데  우리는 미처 못보고 말았다. 보이스카웃 아이들의 “우리모두 다함께...”라는 노래를 부르며 어찌나 즐거워하는지..   소풍가서 무얼 좀 하라고 하면 시큰둥하고 만사 귀찮아하는 우리 아이들과 비교가 되었다.  이 곳 고등학생들도 한적한 곳에 한 두명씩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다. ‘너네 학교에서 담배를 펴도 되냐?’ 고 물으니 말이 안통하는지 쑥스럽게 웃고 만다.

약속시간을 10분이나 넘겼는데도 기사들은 마음좋게 웃어주었다.

오는 길에 차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기사들과 함께...

길이 넘 아름답다. 걸어도 좋을 듯 싶다. 걸어 내려가는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주니 역시 환호성으로 답해준다.

넘 시원하고 아름다운 곳이라 솔로로 내려오는 것이 싫었다.

미니버스타고 카랑판단에서 큰 버스를 갈아타고 오는 데 큰 버스의 차비가 갈 때와 달리 3000루피다.-갈 때는 2000루피-  눈치를 보니 넘들도 다 그렇게 낸다. 역시 거리의 가수들이 번갈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내린다. 사람들은 일일이 동전을 준다.

솔로로 돌아와서는 CIC뱅크에서 환전을 하고 은행 앞 어제의 그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끼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수꾸와 쩨토를 갔다 온 것은 잘한 일 같다. 인도네시아 평범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겁다.

숙소에 돌아와서 빨래를 하고 일기를 쓰며 더운 낮을 피하고 있었다.

5시쯤 다시 숙소를 떠나 고물 시장(뜨리윈드 시장)으로 갔으나 이미 모두들 문을 닫았다.

다음에 끄레웨르 바틱시장으로 갔으나 그 곳도 문을 닫았다. 다음엔 다나르하다(바틱점)을 찾다가 마타하리 몰에 들러 기웃거리다보니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할 수 없이 저녁을 몰에서 먹고(국수를 먹었는데 매콤하게 맛이 깔끔했다.)나니 비가 한결 가늘어졌다. 다시 다나르하다를 찾아갔으나 별로 우리가 살 물건은 없다. 거리로 나왔지만 할 일이 없어 와양오랑이 공연된다는 스리웨가리 공원으로 가기로 하였다. (이 때가 7시 밖에 안됨.)

이리 저리 물어 본 끝에 베짝을 타기로... 우리를 태운 베짝은 비를 막는 완벽한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시설도 좋았고...

도착한 공원은 한산했다. 안쪽의 공연장은 왠일인지 방송장비들이 잔뜩 설치되어 있었고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알고보니 오늘은 방송을 위한 특별공연이 있단다. 현지인들이 하나 둘씩 와서 앉고 우리는 맨앞에 앉았다. 그러나 8시가 넘어도 공연은 하지 않고 준비만 한다.

나중에 분주히 왔다 갔다 하던 남자들이 내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들은 영어를 거의 못한다. 외마디 단어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 이들은 모두 방송관계자였다. 작가, 카메라맨,조감독,오디오맨, 등이 차례로 와서 자기소개를 하고 말을 건다. 작가는 우리에게 커피도 대접하고... 특히 슬라웨시에서 왔다는 거의 우리와 같은 피부색을 지닌 오디오맨은 자기는 와양을 싫어하지만 방송 때문에 여기 왔다고 말한다. 까불까불하고 가벼워보이는 수마트라 출신 카메라맨은 고금 나은 영어로 사람들이 자기를 일본사람과 닮았다고 한다고 한다. 보니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얼굴이 하얀게 그런 것 같다.

인도네시아에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난다.

공연은 가믈란 오케스트라의 연습부터 시작되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가벼워보이는 스텝들이 매우 진지한 표정과 자세로 작업에 임한다. 완벽한 무대장치와 수준급의 가물란 악단,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들을 몰두하게 하였다. 끊임없이 폭소가 터져나오고 스탭들도 빠져들어 함께 웃는다. 대본을 쓴 작가는 자기의 작품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마법에 걸린 왕자가 우여곡절 끝에 마법에서 풀려나온다는 이야기같고 사람들은 그 줄거르를 알고 있는 듯 하다.

거의 끝나가자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 나가고 우리는 마지막 장쾌한 가믈란 연주까지 끝나고 일어서서 박수를 쳐주고 스탭들에게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12시가 다 되어간다.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나가니 베짝기사들이 나타났다. 우리를 기다리겠다던 아까의 베짝은 어디갔는지 모르겠고 마음좋아 보이는 아저씨를 골라 베짝을 타고 텅빈거리를 달리니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다.

정말 알차고 보람있는 하루였다.

내일은 반둥으로 떠나는 날이다. 피곤함에 곧장 자리에 들었다.


1월 21일(화)

쓴돈 : 숙박비-45000루피, 점심:10000루피, 베짝-12000루피, 택시-15000루피

간밤에 잠을 설쳤다. 6시 30분쯤 일어나 어제산 과일과 라면으로 대충 아침을 때운 후 짐을 사들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우리를 태워준 베짝기사는 너무 늙고 힘없어 보여 베짝에 앉아있는 내가 죄인같다. 안쓰러운 지 오는데 오후 9시 20분이 넘었으니 13시간이 걸린 것이다. 온몸이 삶아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출발하고 7시간을 화장실도 안보내고 밥도 안먹이고 줄창 사람들을 태웠다. 내렸다. 하며 간다. 황샘은 나중에 의자에 쓰러져 버렸다. 최고의 악조건이었다.

착해보이는 남자 차장은 그 13시간을 계속 서서가면서 쉬는 시간에도 유리창을 닦는 등 넘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연신 웃는 낯으로 노인들 손을 잡아주고 짐을 들어주고 어린아이들을 안아서 내려준다. 운전사도 13시간을 내리 운전을 하는 최악의 근무조건이었다.

이 버스안엔 일하는 사람이 4명인데 앞차장과 뒤의 나이든 돈 받는 차장, 운전사. 그리고 뭐하는지 모르는 젊은 남자. 이렇게 넷이었다.

힘들고 짜증나는 길이었지만 이들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과 사람들을 대하는 따스한 마음에 우리의 힘듬이 많이 반감되었다.

반둥에 가까워오자 버스안의 4인방은 영어하는 무슬림 여학생에게 우리를 도와주도록 요청하였다. 결국 이들의 도움으로 기차역 가까이에서 내리고 이들은 짐까지 내려준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기차역에서 우리가 찾는 숙수 시카르드나 홈스테이로 골목 골목을 찾아 갔으나 골목이 너무 으스스해서 찾아 준 사람을 의심할 정도였다. 숙소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 다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PatradisaⅡ에 짐을 풀었다. 길거리의 소음과 좁고 지저분한 방. 그래도 씻고 잠에 드니 골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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