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2일(화)맑음

부르고스에 대한 애정, 그리고 미련을 마음에 품은 채
아침 6시 40분쯤 숙소를 나섰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부르고스의 거리를 걸어 대성당 앞으로 향했다.
낮에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부르고스 대성당이지만, 새벽에 마주한 성당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고요한 새벽 속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성당.
어제의 번잡함은 사라지고
어제는 야경으로 바라보았던 그 성당을
오늘은 새벽빛 속에서 다시 만나고,
우리는 산티아고를 향해 길을 나섰다.




대성당을 뒤로하고 강변을 따라
까미노 길을 찾아가는 길은 조용하고 한가했다.
도시가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이라 그런지 부르고스의 아침은 평화로웠다.










그러다 하나둘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지만,
길 위에서 다시 만나면 이상하게 반갑다.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길 친구'가 되어버리는 것이
까미노의 묘한 매력인 것 같다.
부르고스를 빠져나가는 길에 만난 대학촌도 인상적이었다.
운치 있는 건물들 사이를 걷다가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부탁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별것 아닌 작은 친절이었지만
여행길에서는 이런 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덕분에 오늘 하루의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부르고스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는 제법 큰 바를 만났다.
그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가격도 저렴했고 음식도 신선하고 맛있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부르고스를 뒤로 하고 걷는 내내 음식 냄새가
우리를 따라왔다.
젓갈 냄새,김치 찌개 냄새 등이 내내 따라왔다.
부르고스는 생각보다
식품산업이 아주 발달한 공업도시란다. 특히 순례길로 부르고스를 빠져나가 서쪽으로 가면 대규모 Villalonquéjar(비야론케하르)
산업단지 영향권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는 500~600개가량의 기업이 있고,
농식품 산업이 주요 업종 중 하나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앞에 메세타(Meseta)가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
하늘은 놀랄 만큼 넓고 아름다운데,
그 아래 펼쳐진 땅은 너무나 황량했다.
나무도, 그늘도 거의 없는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부르고스에서 12키로 지점 타르다호스에서
쉼을 가졌다. 까미노 바의 음식들은 다 똑같다.
이 쯤되면 까미노 음식이 슬슬 물린다.
우리만 그런줄 알았더니
어제 부르고스 우동집에서 만난
유럽 맨도 질려서 다른 음식을 먹고 싶어
우동집에 왔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다.











이 작은 성당에서
정말 신실해 보이는 수녀님을 만났다.
수녀님은 작은 목걸이를 우리에게 걸어 주시고
진심어린 축복을. 내려 주셨다.
이곳을 돌보는 Hijas de la Caridad(사랑의 딸회) 수녀님들이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맞아 축복하고,
때로는 기적의 성모 메달(Medalla Milagrosa)도 건네준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 메탈을 받은 것이다.
오늘은 부르고스를 지나며
아, 이제 정말 메세타에 들어왔구나.를 느꼈다.
메세타는 스페인 중북부에 펼쳐진 광대한 고원지대다.
까미노 프랑세스에서는
부르고스를 지나면서부터
이 넓고 건조한 풍경을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단조롭고 지루한 길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까미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길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 셋의 느낌도 달랐다.
동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길을 힘들어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이 길이 좋았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그저 한 발 한 발 걷다 보니
생각도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는 길과 하늘뿐이고,
할 일이라고는 걷는 것밖에 없다.
마치 아주 긴 명상을 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두려운 것은 햇살이었다.
그늘 하나 없는 메세타에서
해가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피할 곳이 없다.
아름다운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며 걷는 대신
그 하늘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도
그대로 받아내야 한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오늘보다 조금 더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가능하면 뜨거운 한낮이 오기 전에 많이 걸어두려고 한다.
오늘은 오전 6시 40분쯤 부르고스를 출발해서
12시 40분쯤 호르니요스 델 까미노에 도착했다.
약 여섯 시간.
뜨거운 햇살과 메세타의 첫날을 생각하면
우리 셋 모두 나름 선방했다.
그리고 조금 걱정했던 오늘의 숙소.
어제 숙소 후기를 보고 평이 좋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방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괜한 걱정이었다.
역시 여행에서는 다른 사람의 평가도 참고할 뿐,
결국 내가 직접 경험해봐야 아는 것들이 참 많다.
저녁에는 한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이 작은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 한식당이 있었다.
며칠 동안 빵과 스페인 음식을 먹다가
오랜만에 밥을 먹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좋았다.



길에서 만났던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수다도 떨었다.
낯선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한국말로 웃고 떠들며 밥을 먹는 시간.
이 또한 까미노가 만들어준 작은 즐거움이었다.
오늘부터 시작된 메세타.
화려한 것도 없고, 특별히 볼 것이 많은 길도 아니다.
그저 넓은 하늘과 황량한 들판,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작은 사람들뿐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이 길이 좋았다.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내일도 이 넓은 하늘 아래를 걷는다.
조금 더 일찍 길을 나서서
뜨거운 태양이 따라오기 전에
메세타의 고요함 속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려 한다.
오늘의 숙소
La Casa del Abuelo
마당에 너른 빨래줄이 있어 풍부한 햇살을
받으며 빨래를 말릴 수 있었고
부엌에서 전자렌지용 음식도 만들 수 있고
3인실 방도 깨끗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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