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여행

우즈베키스탄 토성의 도시 히바2

키돌 2024. 10. 20. 01:27

2024년 10월 19일(토) 맑음
이 히바 성안에선 아침 산책을 하고 싶어졌다.
어제 일찍부터 잠을 자기 시작해서
꼼작 않고 7시까지 긴 수면을 취했었다.
그래서인지 아침이 상쾌하다.
8시에 아침을 예약했기에
여유가 있어 성안을 산책하다 돌아오기로 했다.
이른 아침의 성안은 너무나 상쾌하고 아름다웠다.

아침 산책길에서...

기분 좋은 산책을 끝내고
아침 식사를 하는데
꽤나 정갈하고 정중하게 차려져있었다.

조식 먹는 곳에는 이런 전통좌식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을 먹고 느적거리다. -이 곳 히바에선
바쁠 일이 없다.-
외성인 디숀 칼라(Dishon-Qala)를 찾아 갔다.
디숀 칼라는 카라쿰 사막과의 경계를 짓는 약 6km에 달하는 상벽으로 1824년에 세워졌단다.
이 외성인 디숀칼라와 내성인 이찬칼라 사이에는
일반 주민들이 모여 살았는데 히바 칸국 말기에
누를 라바이(Nunilabay)궁전을 지었단다.

우린 숙소와 가까운 북문을 통해 디숀 칼라로 가보기로 하였다.

북문을 나와 공원을 가로질러가니

요런 토성이 나왔다.

내성인  이찬칼라보다는 많이 훼손 된 듯

이 디숀칼라를 끼고 걸어 가면서 누를라바이 궁전으로 갔다.
이 누를라바이 궁전,
바삐 가고자한다면
서문쪽으로 나가는 것이 더 빠를 듯

최초의 우즈베키스탄 사진작가이자 영화 카메라맨인 쿠다이베르겐 디바노프의 작품들이 이 누를라바이 궁전에 전시되어있었다

세이드 이슬람 코자는 히바 칸국의 중요한 개혁가이자 대재상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이슬람 코자 미나레트와 마드라사가 히바에 세워졌다. 이슬람 코자는 교육, 의료, 통신과 같은 사회 기반 시설을 발전시키며 칸국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특히 유럽식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으로 주목받았지만, 이러한 개혁은 보수적인 세력과 갈등을 불러일으켜 결국 1913년에 암살되었다.

"누를라보이 궁전(Nurullaboy Palace)"은  우즈베키스탄 히바 외곽에 위치한 역사적인 궁전으로, 히바 칸국의 마지막 칸들이 사용한 왕궁이었다.
이 궁전 입장료는 히바  통합귄에는 안들어가 있고
별도로 지불해야 한다.(1인 60,000숨)

누를라보이 궁전은 히바 칸국의 근대화를 꿈꾸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건축되었다.
무함마드 라힘 2세(Muhammad Rahim Khan II)와 그의 후계자 아스프한트라이 칸(Asfandiyar Khan)의 지시에 따라 지어진 궁전이다. 이 시기에는 러시아 제국과의 외교 및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전통적인 중앙아시아 건축 양식에 유럽식 요소가 결합된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와 유럽의 영향으로 내부 장식과 가구에서 서양식 디자인이 보인다.

넓은 정원과 호화로운 내부 장식, 거대한 홀과 방들이 궁전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이슬람 건축의 정교함과 함께 당시 유럽의 화려한 건축 미학이 반영되었다.

누를라보이 궁전은 히바 칸국의 통치자들이 행정 업무와 외교적 행사를 진행했던 장소였다.

근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이 궁전은 히바가 고대와 근대를 잇는 중요한 도시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비슷한 궁전을 꼽자면 덕수궁이 아닐까?

여름궁전 연회장

여름 궁전에 있는 야외 부엌. 쁠롭을 만들 수 잏는커다란 가마솥 두개가 있었다

러시아제 뻬치카

궁전 안 천정에는 네면에 이런 야시시한 그림이 있었다.
당시 이슬람교도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다는데
히바 칸국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근대화 과정에서 러시아와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 궁전 장식에는 유럽식 장식 예술과 테마가 도입되었다.
그림에 묘사된 인물과 자연 요소는 고전적인 유럽 회화 스타일을 따르고 있으며, 이는 히바가 전통 이슬람 양식과 함께 외부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란다.

인물 묘사는 사랑, 평화, 자연의 조화를 상징할 수 있으며, 이는 당시 궁정 생활의 아름다움과 풍요를 표현하기 위한 장식적 주제일 수 있다.
이슬람 예술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화가 제한되었지만, 히바 칸국의 말기에는 외부 문화와 접촉하며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그 대표적인 예로, 궁전 내부에 예술적 자유와 외부 문화를 수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전통기법과 서양식 러시아식이 혼합된 궁전 내부
누를 라보이 궁전을 나와
서문을 향해 걷던 중
삼사를 만드는 화덕을 만나
따끈한 삼사 하나씩을 사먹었다.

난을 만드는 여인들과 난 회덕

이 고기가 잔뜩 들어간 삼사 세개와 차 한주전자가 10,000솜(약 1,100원)이다. 현지물가의 아름다움이란.
갓 구어낸 뜨거운 삼사는 충분히 맛있었디. 육즙도 풍부하고.


삼사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서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문은 관광객들로 분주했고
오늘이 토요일인지라 결혼식 커플이 많았다.
이 이찬칼라 성안에서 결혼식을 하면
복을 받고 행복하게 잘 산다는 설이 있어
여기서 결혼식을 많이 한단다.
신혼부부와 함께 따르는 친구들이
흥겨운 춤을 추기도 하였다.
박수를 치면서 웃으며 구경을 하니 나보고도
함께 추잔다.

파흘라반 영묘 내부

신혼부부들이 들러 돈을 넣고 복을 빌고 갔다.

다음에 우리가 찾아간 곳은
파흘라반 마흐메드 영묘(Pahlavan Mahmud Mausoleum)
이 곳은 우즈베키스탄 키바(Khiva)의 유서 깊은 건축물로, 이 지역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는 파흘라반 마흐메드의 무덤이다. 그는 시인이자 철학자, 전설적인 레슬러로 유명하며, 사람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풀어 존경받았단다.
이 영묘는 초기에는 작고 단순한 구조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게 되어 복합 건축물로 확장되었다. 17~18세기에 걸쳐 여름 모스크, 독서실, 묘지 등을 포함한 여러 시설이 추가되었고, 19세기에는 히바의 칸들이 이곳에 매장되면서 더욱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영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푸른색의 타일로 덮인 거대한 돔으로, 키바의 주요 랜드마크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93년 복원 작업을 거쳐 현재까지 보존된 이 영묘는 다양한 색조의 청록색 타일과 정교한 장식으로 장엄한 미를 자랑한다. 오늘날 파흘라반 마흐메드 영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어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우리가 찾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복을 빌고 노래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다음에 우리가 찾아간 곳은
토쉬호빌리 (Tosh-hovil) 궁전
이 궁전은 '돌집'이란
이름을 기진 궁전이다.

토쉬 호빌리 궁전(Tosh-Hovli Palace)은 우즈베키스탄 키바에 위치한 아름다운 건축물로, 19세기 초에 알라쿨리 칸(Allakuli Khan)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궁전은 기존의 쿠흐나 아크(Kuhna Ark)보다 더 화려한 궁전을 만들기 위해 지어졌으며, 총 8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150개 이상의 방과 9개의 안뜰을 갖춘 대규모 건 축물로 완성되었다.
궁전은 여러 개의 안뜰과 정원, 테라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렘, 공식 접견실(메흐몬호나), 재판소(아르즈호나)로 구분됩니다. 특히 하렘은 칸의 부인들을 위한 생활공간으로 설계되었고,
각 거주지에는 정교한 타일 장식과 목재 기둥이 사용되었다.
성격이 급했던 알라쿨리는 궁전을 2년안에 완공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첫번째 건축가를 처형시키기도 했단다.
2개의 입구가 있는데 각기 다른 구역으로 연결된다
공식 알현실과  화려한 아이반 장식을 볼 수 있는
남쪽 구역이 있다.

오늘 우리는 이 토쉬 호빌리 궁전에서 네개의 기둥이 있는 건물만 둘러보고 나왔다.
이 곳에서 뜻밖에 H님의 지인을 만나 회포를 푸느라.
오늘의 1차 일정은 여기까지..
집에서 쉬었다.
2차 일정을 하기로.

아까 삼사와 난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기에
이른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원래는 집 근처 테라사에서 먹으려 했으나
너무 비쌌다. 성밖의 세배정도 가격.
다시 어제 먹었던 성밖 레스토랑으로 갔다.


이찬칼라안 테라사의 내부. 앉아만 보고 우린 다시 나와 상밖 식당으로. 물가를 알아버린 우리가 잘못이다.

우리의 육개장 같은 맛 쌀과 고기와 야채가 들어있다.
마스타바(Mastava) 25,000숨
두 여행 친구들이 만족한 맛이다.

여기에 맥주 한잔 무겁지 않은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우린 다섯시 반에 한다는 서커스 및
전통 공연을 보러 갔으나
아무데도 안한다.
그냥 남문 쪽으로 길을 걸어 가보았다.
어제 걸었던 반대 쪽 성곽을 걷기위해서


남문 쪽에는 특이하게도 무덤이 많았다. 성벽 안팎으로 무덤들이 있는데 이는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을 보호하기위함이고 또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 성스러운 인물들의 무덤 근처에 있으면 축복을 받는다는 믿음도 작용했을 거란다.


우리는 이 남문 쪽 성벽위를 걸어가 보기로 했다.
너무 늦어선지 돈 받는 사람이 없다.(원래는 올라가는 데 10,000숨)

어두어지고 사람들도 없고 조금 걷다가 내려 왔다.


A님이 풍선을 사서 길에서 만난 어린이에게 주었는데
그 어린이의 환희에 찬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성곽에서 내레와 호자 미나렛 쪽에서 공연을 기대했으나
안한다.
포기하기로.
중앙아시아에서 공연은 인연이 없는 걸로

이 히바 그냥 이리저리 걸어도 그저 좋다.

오늘 밤에도 테라스에서 본 달이 휘영청이다.
당분간 이 꿈을 꾸고 있겠지.